[가을엔 한양도성] 성곽길 따라 물든 가을빛…'순성놀이' 해볼까

도성 한 바퀴 돌며 풍경 즐기는 조선풍습
한양도성 복원하며 '재조명'…가을엔 단풍 즐기기에 제격


가을을 맞은 한양도성 [서울시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도성의 둘레는 40리나 되는데, 성을 한 바퀴 돌아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구경하는 것은 멋진 놀이다."

조선의 정조 때 실학자 유득공(1748∼1807)은 한양의 세시풍속을 소개한 저서 '경도잡지'에서 '순성(巡城)'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방에서 과거시험을 치러 상경한 선비들이 한양을 빙 둘러싼 도성을 돌며 합격을 기원했던 풍습은 한양 사람들에게 전해져 '순성놀이'가 됐다. 둘씩 짝지어 성곽을 따라 걸으며 도성 안팎의 경치를 감상하고 봄가을로 꽃과 단풍을 즐겼다.

새벽에 출발하면 하루가 꼬박 걸리고, 산길이 험해 중간에 지쳐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지만, 조선 시대 한양 사람들은 순성하는 날을 무척 기다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한양도성이 훼손되며 순성놀이는 점차 서울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위해 침투한 1968년 1·21사태 이후엔 핵심구간인 북악산 숙정문∼창의문의 출입이 금지되면서 오랜 기간 순성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런 순성놀이가 되살아나고 있다.

끊겼던 성곽이 서서히 복원되고, 출입이 막혔던 구간이 뚫리며 한양도성은 다시 서울사람들이 사시사철 찾아 자연을 즐기는 곳이 되고 있다.

서울 단풍이 절정에 이르는 11월엔 성곽 길을 따라 물든 가을빛을 즐기러 한양도성을 찾는 이들이 특히 많다.

서울 도심을 둘러싼 한양도성

◇ 내사산 능선 타고 흘러내리는 '서울의 얼굴'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낙산(125m), 인왕산(338m), 남산(265m), 북악산(342m)에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이들 산의 능선을 타고 조성된 한양도성은 옛 수도의 윤곽을 보여주고 있다.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한양도성의 전체 길이는 18.6km. 현존하는 전 세계 도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한양도성의 나이는 올해로 만 621살이다.

조선 태조 5년인 1396년 1∼2월 농한기 때 전국에서 11만8천명을 동원해 1차 공사를 했다. 같은 해 8∼9월 2차로 7만4천명을 동원해 성곽을 완성하고 사대문(숭례문·숙정문·흥인지문·돈의문)과 사소문 석축을 쌓았다.

각각의 공사 기간은 49일씩으로, 100일도 채 안 되는 기간에 한양의 외양인 '도성'이 완성됐다.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성곽 공사에 얼마나 많은 인력을 동원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양도성 축성 공사는 180m씩 97구역으로 나눠 진행됐다. 각 구간 공사는 함경도·전라도 등 군현별로 할당됐다. '공사 실명제'가 도입됐기에 지금도 성벽 곳곳에 어느 군현에서 맡아 공사했는지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양도성의 성곽 [서울시 제공]


공사 시기에 따라 모습이 다른 성곽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북악산 구간 한양도성에선 성벽이 축조된 시대별 차이를 확연히 볼 수 있다. 숙종(1074년) 때는 석재를 정사각형에 가깝게 규격화해 튼튼히 쌓았다. 석재 하나의 무게는 장정 4명이 들어야 할 정도였다. 태조(1396년) 때는 큰 메주만 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다. 2017.11.1
chopark@yna.co.kr

흙으로 쌓았던 성곽이 홍수로 일부 무너지자 세종 4년인 1422년 전면 보수 공사를 해 성곽 전체를 돌로 다시 쌓았다. 현재 볼 수 있는 성곽의 모습은 이때 어느 정도 갖춰진 셈이다.

숙종 30년인 1704년 보수 공사를 하면서는 성벽에 공사 감독관 직책과 이름, 날짜까지 기록해 놓은 곳이 있어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대한제국기 고종 황제 때까지 제 모습을 지키던 한양도성은 1900년 즈음부터 속절없이 헐려 나가기 시작했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되면서 가장 먼저 성문이 제 기능을 잃었다. 1908년엔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려고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됐다. 이후 산성을 제외한 평지 성곽 대부분이 사라졌다.

해방 이후엔 주택과 도로를 지으며 성벽을 훼손하는 일이 잦았다.

한때 총 18.6km 구간 중 10.5km만 남았었으나 근래 꾸준한 복원 작업을 통해 13.4km(전체구간의 72%)가 원형에 가깝게 정비됐다.

북악산의 가을 [서울시 제공]

◇ 순성의 하이라이트는 북악산

한양도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쌓았기 때문에 다른 유적지와 달리 출입구가 따로 없다. 어디에서 시작하든 한 방향을 따라가면 시작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한양도성을 여러 차례 찾은 전문가들은 북악산에서 시작해 낙산, 남산, 인왕산 구간으로 도는 시계 방향 순성을 추천한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최근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에서 "한양도성 순성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북악산 정상이며, 한양도성 개방의 상징은 숙정문"이라면서 북악산 구간을 치켜세웠다.

'한양도성, 서울 육백년을 담다'를 쓴 홍순민 명지대 교수도 "어디로 가도 된다면 먼저 백악(북악산)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백악구간은 1·21 사태 이후 오랫동안 닫혀있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결정으로 2007년 4월 5일 전면 개방됐다. 다만, 아직 군사지역으로 분류돼 있어 신분증을 들고 가 본인 확인을 해야 출입할 수 있다.

백악구간 말바위에서 내려다본 성북동[서울시 제공]

창의문 안내소를 지나면 끝없는 오르막이 이어진다. 순성을 시작한 뒤 30분도 안 돼 '방향을 잘못 택했다'는 후회가 들 수 있다. 커다란 돌계단은 보폭을 한껏 키워봐도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노약자나 어린이가 오르기엔 힘든 곳이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능선을 오르면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절경이 펼쳐진다.

앞으로는 북한산 비봉과 보현봉, 형제봉이 늠름한 모습을 뽐낸다. 뒤로 돌아서면 인왕산 능선 따라 한양도성이 뻗어 내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양도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백악마루(342m)에선 세종로는 물론 강 건너 63빌딩까지 서울 전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백상진 백악구간 해설사는 "맑은 날에는 강남 타워팰리스까지 조망할 수 있다"고 했다.

1·21사태 소나무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수령이 200년정도 된 나무에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려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우리 군경이 교전한 흔적이다. 2017.11.1
chopark@yna.co.kr

백악마루에서 장쾌한 풍경을 감상하고 내려가다 보면 이내 1·21 사태 소나무가 나타난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된 나무에는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청와대를 습격하려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과 우리 군경이 교전을 벌인 흔적이다.

1·21 사태 소나무를 지나 다다르는 청운대는 광화문광장과 경복궁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전망 포인트'다. 광화문광장 촛불집회 모습을 이곳에 올라 찍었다면 어떤 사진이 나왔을지 궁금증을 품게 하는 곳이다.

한양도성의 하이라이트가 백악이라면 백악 구간의 하이라이트는 '곡장'이다. '곡성'으로도 불리는 곡장은 성곽 밖에서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곡선 형태로 성을 쌓은 곳이다.

한줄기로 쭉 달음박질치던 성벽은 여기서 쉬어간다. 성안과 밖을 넘나들며 발걸음을 옮기면 평창동과 성북동, 삼청동이 두루 보인다.

한양도성 낙산구간[서울시 제공]

◇ 흥인지문서부터 도성 찾기 '숨바꼭질'

북악산 말바위를 지나 혜화동 길로 접어들면 성곽이 주택가 사이로 이어지다 끊어지다를 반복한다.

축대 위엔 주택들이 들어차 있고 그 끝에 1년 전부터 한양도성 탐방안내센터로 활용되는 옛 서울시장 공관이 있다. 1940년 지어진 유서 깊은 목조건물이다.

대법원장 공관으로 사용되던 이곳에선 1980년 18대 박영수 시장 때부터 2013년 35대 박원순 시장 때까지 역대 서울시장이 살았다. 박 시장은 옛 시장공관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기로 하고 2년여간 리모델링해 한양도성 안내센터로 만들었다.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낙산 구간은 경사가 완만해 성곽 안팎의 마을을 천천히 구경하며 걷기 좋다. 야간 조명이 잘 돼 있어 밤 산책을 즐기는 가족 단위 탐방객과 연인들도 많다.

낙산에서 내려와 흥인지문에 다다르면 여기서부터 '도성 찾기'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한양도성 낙산구간의 야경 [서울시 제공]

도로로 끊긴 성곽의 흔적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동편에서 다시 찾을 수 있지만 DDP를 지나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도통 찾기 어렵다. 숨바꼭질이 싫다면 바로 한양공고 뒤쪽으로 가 광희문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여기서부터 또 이어지고 끊어지길 반복하는 햔양도성은 장충체육관 뒤에서 얼굴을 내민다. 남산 구간의 시작이다.

남산에선 계속해서 도성을 따라 걷기 어렵다. 도성이 지나는 자리를 반얀트리 호텔과 미군 휴양소 캠프 모르스가 차지하고 있다.

남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차도 옆에서 다시 찾은 도성의 바깥쪽으로는 멋진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소나무 숲이 뿜어내는 영기(靈氣) 때문에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지나야 할 것만 같다.

소나무 숲을 옆에 낀 남산 성곽 역시 낙산과 함께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한양도성 남산 구간의 야간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한양도성 남산 구간은 야간 조명이 잘 돼 있어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201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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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구간에서 내려다본 서울 풍경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한양공원 인왕산 구간 역시 장쾌한 서울 도심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201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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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 정선 그림의 단골 소재 인왕산

남산 팔각정 광장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갈 때는 가파른 계단길이 이어진다.

내리막길 끝의 백범광장을 건너 소월로를 지나면 숭례문에 다다른다.

성곽은 본래 숭례문에서 정동을 지나 현재 강북삼성병원이 있는 돈의문(서대문) 터로 이어졌지만, 정동에서 도성의 흔적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강북삼성병원 뒤편 서울시교육청을 지나야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다.

성곽은 행촌 성곽마을 연립주택의 축대로 쓰이기도 하고 모습을 감추기도 했다가 인왕산 초입인 사직터널 북쪽 구간에 다시 나타난다.

김종대 한양도성 해설사는 "인왕 구간은 선바위, 부처가부좌바위, 거북이 바위 등 풍광이 빼어난 바위를 볼 수 있는 곳"이라며 '바위 감상'을 추천했다. 인왕산은 겸재 정선이 그림의 단골 소재로 삼았던 곳이다.

인왕곡장에서 내려다본 서울시내 [서울시 제공]


서울시교육청 뒤편에서 보이는 인왕산의 모습(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대형 아파트단지에 가려졌던 인왕산은 서울시교육청에서 월암근린공원으로 향하는 길목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201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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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오르는 길은 북악산 못지않게 가파르다. 밧줄에 의지하기도 하고, 가파른 경사로를 기어오르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고생은 잠시,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확 트인다. 날이 맑으면 인천 앞바다까지 보인다고 한다.

성곽을 따라 하산해 이르는 곳은 청운공원이다. 공원 너머로는 북악산 구간 출발 장소인 창의문이 다시 의젓한 모습으로 탐방객을 맞는다.

하루에 순성을 모두 마치려면 10시간여가 걸린다.

chopar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