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강대흥씨 유족 "일본 땅은 절대 밟지 마라" 동생은 강제징용에 원폭 피해…평생 폐질환 앓다가 사망

<※ 편집자 주 = 내달 1일은 일본에서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지 92년이 되는 날입니다. 대지진 이후 국민의 분노를 돌리고자 일본 정부가 모함해 조선인 6천명이 죽는 간토대학살이 발생했습니다. 천인공노할 만행이었음에도 참상의 진상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숨겨진 진실을 찾는데 진력해온 재일동포 다큐멘터리 감독 오충공씨와 함께 간토대지진 유가족이 겪은 고통을 재조명하는 기획 기사를 세 꼭지 송고합니다.>

(창원·함안=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浜)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40만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재앙으로 사회혼란이 커지자 국민의 분노는 치솟았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약탈을 일삼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악의적인 유언비어였다. 실제로 재일 조선인 6천여명이 군경과 자경단이 휘두른 죽창 등에 살해됐다. 이른바 간토대학살극이 벌어진 것이다.

참사가 일어난 지 92년, 광복을 맞은 지 70년이 됐지만, 유족의 아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경남 함안군 칠원면 유원리에 있는 간토대지진 희생자 강대흥씨의 비어 있는 묘가 이런 현실을 상징한다. 강씨의 시신을 찾지 못해 고향에 가묘(假墓)를 지어놓은 것이다.

최근 일본에 강씨의 유골과 진짜 묘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이 가묘가 새삼 주목받은 바 있다.

연합뉴스는 이달 17∼21일 간토대학살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인 재일동포 오충공 감독과 함께 강씨의 가묘를 둘러보고 후손을 만났다.

◇ 빈 무덤을 지키는 후손들의 아픔

"아버지가 세상 버리기 전에 이 사실을 아셨으면 좋았을 텐데…"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거주하는 강대흥씨의 손자 광호(65)씨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이지만 그의 유골이 일본에 모셔져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소감을 전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씨가 학살당한 사실을 강씨와 함께 일본에 건너갔던 한동네 사람이 전해줬고, 시신을 수습할 길이 없었던 가족들은 가묘를 지었다.

그러다 올해에야 일본에 강씨의 유골과 묘가 있다는 사실이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자료를 토대로 대조 작업을 진행한 이진희 미국 이스턴일리노이대 교수의 연구로 알려졌다.

손자 강씨는 "할아버지를 뵌 적은 없지만 제사를 모시니 늘 마음속으로 생각해 왔다"면서 "유복자이신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았으면 좋아하셨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유족들은 1923년 강씨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가묘를 만들어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왔다. 지난 6월에는 흩어져 있던 일가의 유골을 한데 모아 이장하면서 강씨의 가묘도 가족들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강씨는 "당시 묘에는 시신 대신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을 묻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일본에 있는 할아버지 묘에 가서 유골을 되찾아 고향 함안에 묻어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강대흥씨는 그 시절 집안의 기둥이랄 수 있는 종손이었기에 사망 이후 이들 일가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강씨는 "당시는 아무래도 장남에게 교육비를 가장 많이 투자할 때"라며 "할아버지 사후에 할머니와 아버지가 특히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기억했다.

이런 아픔 때문에 강씨 가족에게는 일본을 증오하는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

강씨는 "우리 대(代)까지만 해도 일본에 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 "내가 젊었을 때 일본에 갈 일이 있었는데도 아버지가 '그 땅은 절대 밟지 마라'고 해서 결국 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남편을 잃은 할머니는 끼니를 먹을 때 외에는 잡념을 떨치려는 듯 늘 밭을 쏘다니며 일만 하다 돌아가셨다는 게 강씨의 기억이다.

강씨는 "간토대학살 피해자가 6천여명이라는데 지금 그 후손의 수를 따지면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이라며 "정부가 하루빨리 관련 조직을 만들어 조사를 진행해서 나와 같은 사람의 애환을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오 감독은 유족들과 유원리 가묘에 들러 주변의 흙을 퍼 담았다. 그는 "내달 4일 일본 사이타마(埼玉)에서 강씨의 추도식을 열 예정"이라며 "이때 강씨의 진짜 묘에 이 흙을 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 형은 학살, 동생은 원폭…형제의 비극

비극은 강대흥씨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강씨 일가에 따르면 강대흥씨의 막냇동생은 강제징용과 원폭 피해를 겪었다.

형제가 나란히 일제강점기에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 것이다.

강대흥씨의 가묘에서 만난 강씨의 조카 무중(67)씨는 "우리 아버지도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 혹사당하다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당했다"고 증언했다.

강씨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강대협씨는 불과 16살밖에 안 되던 1936년 히로시마 인근 공장으로 징용돼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다 1년여 만에 공장에서 탈출했고, 우여곡절 끝에 히로시마의 세탁소에 취직해 그곳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자식도 낳았다.

강씨는 "아버지가 시내 이발소에 있을 때 원폭이 떨어졌다"면서 "순간 '번쩍' 하더니 건물이 무너지고 온천지가 암흑이 됐고, 잔해에서 기어나와 보니 온통 불바다였다는 게 아버지의 회상이었다"고 전했다.

이 사고로 강대협씨는 머리가 정수리부터 뒷목까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고 평생 폐질환을 앓았다.

강씨는 "아버지는 평생 폐병에 시달렸고 남들이 보기엔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늘 콧물을 흘렸다"면서 "조금만 힘을 쓰는 일을 해도 호흡이 가빠서 일하기 어려웠고 결국 폐질환으로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강씨는 "아버지는 원폭이 터진 이후 '일왕이 조선인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죽이라고 했다'는 소문이 돌아 급히 밀항선을 타고 귀국했다"면서 "당시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형이 밀항선에서 세상을 등져 내가 팔자에 없는 장남 노릇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강씨 일가족은 2007년 강대협씨의 강제징용 피해를 인정받아 적게나마 보상금을 받았지만, 여전히 원폭 피해에는 변변한 배·보상을 받지 못했다.

강씨는 "우리나라도 이제 이만큼 살게 됐으면 과거 어려움을 겪은 국민을 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원폭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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