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 경제난·세계 최고수준 범죄율…"카라카스에서 관광하겠다고?" 세계최고 인플레이션 "소액권 거스름돈 쓸모 없어서 안 받는다"

<※편집자주 = 베네수엘라는 올해 예상 인플레이션이 1천600%에 달할 정도의 경제난을 겪고 있습니다. 석유 매장량 세계 1위 국가로 한때 중남미에서 가장 부국이었던 베네수엘라는 우고 차베스·니콜라스 마두로 등 두 대통령의 사회주의 지배를 거치면서 성장 기반이 무너지고 국제 유가 폭락까지 겹쳐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현장 방문취재를 바탕으로 베네수엘라 경제 상황, 식량 사정, 정치 동향, 서민과 여성의 삶, 전문가 분석 등 5꼭지를 송고합니다.>

(카라카스=연합뉴스) 김지헌 특파원 = 올해 예상 인플레이션 1천600%.

정부 공식 환율은 무의미해진 지 오래이고 암시장 환율은 요동친다. 제조업 붕괴로 수입품이 물가를 좌지우지한다.

정부는 지난달 최고액권 화폐인 100볼리바르 지폐 유통을 중지하고 500볼리바르 지폐를 찍겠다고 했으나 감감무소식이다.

말 그대로 혼란 그 자체다. 베네수엘라의 현주소다.

치솟은 물가 탓에 소액권으로는 그 어떤 생필품도 살 수 없어 최고가인 100볼리바르 지폐만 유통했는데 정부가 이를 없애고 500볼리바르를 발행하겠다고 하자 베네수엘라 곳곳에서 서민들은 100볼리바르를 은행에 넣어두려 장사진을 치고 있다.

이런 화폐개혁 움직임 때문에 현금 마저 부족해진 것도 생필품 구득난을 가중시킨다. 식량을 포함해 생필품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탓에 현금이 있어도 물건 구하기는 쉽지 않다. 슈퍼마켓은 어디를 가나 수시간씩 줄을 서야 한다.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면서 한 때 '가난할 수 없는 나라'로 불린 베네수엘라가 지금은 최고 인플레이션과 최저 성장률로 신음하고 있다.

◇ "관광왔냐?"고 되묻는 입국심사대 이민국 공무원

카라카스의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에 도착한 구랍 26일(현지시간), 공항은 썰렁했다.

넓은 공항엔 항공기가 10대에 불과했다. 연말 여행객으로 북적여야 했지만, 공항치고는 인적이 드물었다.

공항 청사 긴 복도의 '무빙워크(moving walk)'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민국 직원은 방문 목적이 "관광"이라는 말에 기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벌떡 일어서 "관광? 카라카스에 관광하러 왔다고?"라고 되물었다. 이런 나라에 관광 올 사람이 없는데 거짓말하는 것 아니냐는 투였다.

극도의 경제난에 지난해 인구 10만 명 당 살인 119건으로 세계 1위(전쟁 지역 제외)인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관광하러 왔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기자는 그래서 친구를 보러 왔다고 얼버무리고 겨우 통과했다.

공항 벽엔 "볼리바르식 혁명을 건설해가며"라는 표어가 적혀 있었으나 공허한 느낌만 들었다.

카라카스 시내 곳곳에선 은행, 빵, 옥수숫가루, 가스 등 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나 재화를 구하는 장소에는 어김없이 긴 줄이 있었다.

교육부 앞에도 긴 줄이 있었는데, 대학 졸업장 인증 도장을 받는 줄이라고 한다. 한 시민은 "학위 소지자들이 좋은 일자리를 구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정부가 졸업장 인증을 해준다"고 귀띔했다.

기자가 이를 찍으려고 DSLR 카메라를 들이대자 근처 가게의 주인이 뛰어나와 "카메라는 숨겨라.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외쳤다. 강탈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라카스는 아직 식량 사정이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29일 찾은 중산층 동네의 한 슈퍼에 빵, 고기 등 먹거리가 제법 많았으나 가격이 비싸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2.845㎏짜리 소고기 한 덩어리 가격이 2만6천174 볼리바르로 최저임금 2만7천300 볼리바르에 육박했다.

베네수엘라인들이 전통적으로 12월 31일에 가족과 먹는다는 돼지 뒷다리는 6만3천307 볼리바르로 최저임금의 2.3배였다.

이 슈퍼 계산대에는 지문 인식기가 설치돼 모든 구매자는 지문을 찍어야 했다. 한 쇼핑객은 "정부는 저 기계로 누가 뭘 샀는지 다 알 수 있다"며 "사재기를 못 하게 하려는 것이다. 지문 확인하는 기계 살 돈으로 식량을 싼값에 공급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 '제멋대로' 환율,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에 신음

명목상 베네수엘라 정부는 1달러당 9.95 볼리바르의 고정 환율을 유지한다.

그러나 기자가 카라카스에 체류한 지난달 26∼30일 암시장 환율은 1달러당 2천800 볼리바르였고, 이달 2일 3천200 볼리바르를 넘었다.

이런 암시장 환율은 매일 널을 뛴다. 더 큰 문제는 생필품 대부분이 수입산이어서 암시장 환율변동이 물가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점이다.

정부는 공식 환율과 실제 암시장 환율 차이를 외면하면서, 그로인한 엄청난 부담은 서민과 기업 등에 전가하고 있다.

26일 찾은 카라카스의 베네수엘라 최대 쇼핑몰 '삼빌'에 가보니, 인기 아동복 브랜드 'EPK' 매장 앞에는 '80% 세일' 표지판이 붙어 있었고 긴 대기 행렬이 자리잡은 가운데 한 사람씩 입장시키고 있었다.

폭등하는 환율로 해당 업체가 판매가를 대폭 올리자 베네수엘라 '공정가격감독청'(SUNDEE)이 강제 가격 인하 명령을 내려 상품 가격이 내려가자 소비자들이 대거 몰려 어쩔 수 없이 1명씩 들여보내 물건을 고르게 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는 올해 베네수엘라 인플레이션을 1천600%로 예상했다.

이처럼 상상 이상으로 물가가 치솟아 상품 구매 때 들고 가야할 지폐가 너무 많아졌다.

작년 11월 13일 시내버스를 납치했던 강도들이 손님을 상대로 현금은 사절하면서 카드 결제기를 들이밀고 일정 금액 결제를 강요하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카라카스 시민 프랑클린 곤살레스(44)는 지난달 27일 차에 기름을 채우면서 요금으로 404볼리바르가 나오자 500볼리바르를 건네고 그대로 떠났다.

곤살레스는 "가치가 없는 소액권은 쓰는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잔돈 받는 것은 불가능하고 받아봐야 쓸 곳도 없다"고 설명했다. 곤살레스가 받지 못한 96볼리바르는 이날 암시장 환율 기준 약 41원이었다.

카라카스 시내 맥도날드에선 햄버거 세트에 감자 튀김 대신 남미 토착 작물인 유카(yuca) 튀김을 준다.

매장 직원은 "베네수엘라산 감자는 품질이 떨어지고 수입 감자를 쓰자니 도저히 수입가격을 댈 수 없어서 유카를 내놓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오락가락 경제 정책…혼란 조장하는 마두로 정권

베네수엘라 위기는 일차적으로 국제 유가 하락에 있다. 베네수엘라 수출의 95%는 석유여서다.

세계 석유 매장량 1위인 베네수엘라는 매장량의 60%는 채굴 비용이 많이 들고 채산성이 낮은 중질유이다. 때문에 유가 하락의 직격탄을 맞았다.

1999년 이후 차베스와 마두로 대통령이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 복지 정책을 대폭 확대한데 대해 유가는 폭락하면서 어려움이 가중됐다.

여기에 지난달 11일 마두로 대통령이 100볼리바르 지폐의 유통을 그 다음 주말부터 중단하고 500볼리바르 지폐 발행을 선언하면서 혼란은 극에 달했다. 미 달러로 2∼3센트 가치에 불과한 100볼리바르 지폐는 이미 시중에 60억 장 이상 풀린 상태여서, 이를 다른 지폐로 바꾸려는 사람들로 금융기관은 북새통을 이뤘다.

마두로 대통령은 "볼리바르 화폐를 쌓아두는 '마피아'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방법은 극히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베네수엘라인의 약 40%는 은행 계좌가 없어 무용지물이 된 100볼리바르를 처리하지도 못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두고 때아닌 '화폐 대란'이 발생하면서 음식을 살 수단조차 없어진 베네수엘라인들은 폭동과 약탈을 일으켜 남부 지방에서 최소 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체포됐다.

카라카스 시내 여러 노점상엔 '현금 안 받음. 카드 가능'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처치가 곤란하고 앞날도 불투명한 100볼리바르 지폐를 애초에 거부하는 것이다. 한 카라카스 시민은 "마두로는 국가를 엉망으로 만들고 국민을 힘들게 한 북한의 김정일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혼란이 커지자 마두로 대통령은 100볼리바르 지폐 유통 중지 시점을 이달 2일로 미뤘다가, 그래도 불만이 가라앉지 않자 이달 20일로 다시 연기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100볼리바르 유통 중지와 함께 200, 500볼리바르 등 액면가가 더 높은 지폐를 곧 시중에 풀겠다고 발표했으나 핀란드·스위스 등에 주문한 새 화폐는 대금을 치르지 못해 베네수엘라에 건네지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두로 대통령은 여전히 "새 화폐를 저지하기 위한 '국제적 사보타주'가 일어나고 있다", "신이 도와주실 것" 등의 발언만 내놓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마두로 대통령을 지지하는 '관제데모'가 판친다.

지난달 27일 카라카스 도심 공공행정부 청사 앞에선 제2 여당인 '모두를 위한 조국'(PPT) 당원 십여 명이 "웹사이트 '달러 투데이'를 없애라"며 시위를 벌였다. 달러 투데이는 베네수엘라 볼리바르와 달러간 당일 암시장 환율을 알려주면서 관영 매체들이 전하지 않는 각종 소식을 싣는 웹사이트다.

집회 참가자들은 "달러 투데이는 야당이 운영하고 있다"며 "이들이 혼란을 일으키면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으니 정부는 즉시 이 사이트를 폐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집회에 나온 카를로스 아푸르아(66)는 "달러 투데이는 미국의 전자 인터넷 시스템을 이용해 우리나라에 테러를 저지르고 있다"며 "미국과 짜고 우리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한 범죄적 작전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j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