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 7월1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흥미로운 사고가 실렸다.

'부인기자 채용'이라는 제목의 이 사고는 "세계의 추세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성해방이 요원하다"고 지적하고 "가정 개량과 여성계 개조를 위해 현숙하고 박학한 부인기자를 모집한다"라고 밝혔다. 응모자격은 '가장이 있는 부인'으로, '20세 이상 30세 이하,''고등보통학교 졸업 정도 이상으로 문필의 취미가 있는 부인'이었다. 첫 번째 요건이 기혼 여성이므로 명칭도 '여기자'가 아니라 '부인기자'였다.

이 사고를 보고 응시해서 선발된 사람이 이각경이었다. 우리나라 여기자 1호였고 공채기자 1호였다.

1920년 3월 조선일보, 4월 동아일보가 각각 창간됨에 따라 유일한 한글 신문으로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매일신보는 이들 민간지와 경쟁을 벌여야 했다. 여기자 채용은 여성 독자 확보를 위한 상업적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1920년 9월5일자에는 "금회에 본사 입사한 부인기자 이각경 여사, 오늘의 부인 사회를 위하여 건전한 붓을 휘두를 그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이각경의 입사를 알리는 기사와 이각경의 '입사의 변'이 실렸다.

매일신보는 비록 총독부 기관지이기는 했지만 1920년 민간지들이 창간되기 전까지 하나뿐인 한글 신문으로서 근대 언론사에서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한다. 총독부 홍보기사만 실은 것은 아니었고 이광수의 '무정' 같은 문학작품을 소개하기도 했고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해 9월14일 '부인기자의 활동'이라는 제목으로 이각경의 첫 기사가 나간 이후 가정방문 기사, 봉건적 가정생활의 폐해를 지적하는 계몽 기사, 생활개량 기사 위주로 이각경이 쓴 40여건의 기사를 매일신보에서 찾을 수 있다.

남자 기자들이 다루기 힘든 가정방문 기사는 당시 기준으로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가정을 대상으로 했다. 일반 독자들이 호기심을 갖는 개화되고 유복한 가정을 찾아다녔다.

'가정부인' '부인과 가정'이라는 고정 제목으로 조혼, 축첩, 며느리 학대, 부부간 불평등 등 가정생활의 불합리한 봉건적인 요소들을 지적했으며, 신여성의 문제점, 아동교육, 교양, 위생문제 등을 다룬 기사들을 통해 여성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서구 여성 중에는 과학자도 많고 여성들이 직접 부인적십자사나 보육원 같은 것을 운영하기도 하며 정치, 상업, 공업 분야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데 비해 조선 부인들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다고 통탄했다.

'금일 시대는 여자교육시대', '자유와 개방적 생활-오늘날은 남자만 의뢰 말고 각기 자유롭게 활동해야', '축첩에 대한 이해', '유랑하는 남자의 회개는 부인의 충고에 있음', '시부모여 며느리도 자식이거늘 왜 그리 노예시하는가', '조혼의 악습을 타파', '황폐한 예의를 개선하라', '위생에 관한 주의', '신구절충주의-혼례식은 이렇게 함이 좋아', '조선 부인들의 아동교육', '부인의 머리치장에 대하여', '부인의 부업 필요' 등의 기사 제목을 보면 그가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그렇지 못한 여성들의 계몽을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의 개인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이각경은 지금부터 120년 전인 1897년 2월19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한성고등여학교 기예과에 이어 사범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집안의 반대로 귀국했다. 1920년 매일신보에 입사한 이후 1921년 4월25일자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마지막으로 그의 기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1925년 7월30일 이각경이 음독했다는 기사가 모든 신문에 일제히 실렸다. 기사에 이각경의 신분이 공립 마포보통학교 여교사로 되어 있으니 매일신보를 그만두고 교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자택에서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응급치료를 했으나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신문들은 담당 의사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직전에 남편과 기생 애인이 경성 교외에서 밀회를 즐기다 본처인 이각경에게 발각된 후 기생이 음독자살한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신문이 이 사건을 전하며 기생의 자살과 이각경이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 이각경은 평소 남편, 시부모와 갈등이 심해 이미 수차례 음독한 경험이 있었다. 거기에 가정불화가 만천하에 공개되고 기생의 자살이 자신과 연관이 있다는 식으로 알려진 것에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각경 가족의 제적부에는 이각경이 1936년 2월24일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신문 기사에서처럼 1925년 7월 음독으로 사망한 것인지, 제적부의 기록대로 1936년 사망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망 시점과 상관없이 1925년 7월 자살을 기도한 이후 이각경은 완전히 잊힌 존재가 됐다. 제적부 기록대로라면 이각경은 자살을 기도한 후에도 11년이나 더 살아있었다. 이각경의 뒤를 이어 민간지에 여러 명의 여기자가 등장했다. 이각경이 생존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간에 신문이나 잡지 기고문, 여기자를 비롯해 여류 명사들의 근황을 다룬 기사, 여기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좌담 기사들을 살펴봐도 이각경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신교육을 받았고 첨단 직업을 가진 신여성이었으나 봉건적인 사고가 지배하던 조선 사회의 여건을 극복하지 못했다. 여전히 보수적인 관념을 넘어서지 못했고 봉건적 미덕에 애착을 가졌다. 여성들을 억압하는 봉건사회의 폐단에 대해 문제는 제기했으나 해결방안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렀다. 기사 내용을 보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본인이 하기 나름이라는 식이었다.

1924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최은희, 1925년 동아일보에 들어간 허정숙, 1926년 시대일보 기자가 된 황신덕 등은 일에서나 개인 생활에서나 훨씬 진보한 여성의식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기사를 통해서 여권신장을 부르짖었으며 실제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이각경은 여성을 계몽하는 일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사를 통해 선각 여성으로서 사명감으로 여성들을 깨우치고 여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의 입사를 알리는 기사의 제목에서처럼 '부인 사회를 위한 건전한 붓'이 되고자 했다. 아쉽게도 이각경의 사회생활은 단명했지만 그는 이후 여기자들의 활동에 '여성 계몽'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각경이 여기자가 되고 나서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사회가 발전하고 여성들의 지위도 향상됐다. 현재 한국여기자협회에만 31개 회원사 1천30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회원이 아닌 여기자들까지 합친다면 우리나라의 여기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질적으로도 오늘날 여기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스포츠, 국제 등 제한 없이 다양한 분야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굳이 여기자로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오늘날 젊은 여기자들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 전후 복구,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거쳐 험난한 세월동안 일터에서, 가정에서 편견을 극복해낸 여기자들의 쌓인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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