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초 첫 채굴…한때 전국 은 생산량 60% 차지
은값 상승 타고 최대 호황 누리다 경영난으로 폐광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인천 한복판에서 은을 캐던 때가 있었다. 불과 30년 전인 1987년까지 명맥을 이어 온 '부평 은광(銀鑛)' 이야기다.

비록 광산은 문을 닫았지만, 아직도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부평 인천가족공원 초입에서 왼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지금은 닫힌 갱도가 나온다. 바로 옛 부평은광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한때 전국 은 생산량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큰 규모였던 이 광산의 역사는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평문화원이 펴낸 부평은광 자료집에 따르면 1937년 12월 '부평광산이 첫 채굴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관보에 실렸다.

당시 인천상공회의소 이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타니 사쿠지로가 광산 출원 허가를 내고 사업을 시작했다.

은을 품은 광산의 넓이는 광활했다.

당시 광산은 만월산 일대와 주변 법성산 인근까지 무려 300만여㎡(91만9천평)에 달했다. 초기 은 채광량에 대한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채굴 여건이 열악해 많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평은광에서 본격적인 은 채굴이 시작된 건 1965년께다. 경인철광주식회사가 광산을 운영하기 시작한 때와 맞물린다.

경인철광회사는 당시 최기호 영풍기업 사장이 부평 만월산 광산 개발을 위해 세운 자회사였다.

이 회사가 국립지질조사소(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와 벌인 지질 조사는 부평은광의 진정한 가치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부평은광은 금이나 동을 캐면서 은이 딸려 나오는 형태의 다른 광산과 달리 은만 주로 채굴되는 광산으로서 그 의미가 컸다. 은이 묻힌 규모도 국내 최대였다.

특히 1970년대 은 수출이 급증하면서 부평은광은 그야말로 호황기를 맞았다.

1978년 8월 29일 매일경제에 실린 기사에는 '은값 상승으로 중간 상인들만 많은 이익을 취하는 걸 막기 위해 정부가 공매제도를 부활시켰고 은은 g당 92원에서 140원으로 판매 가격이 올랐다'고 쓰여있다. 은 수출량 증가에 은값 상승이 맞물린 것이다.

이때 부평은광은 연간 은 3만5천㎏을 생산해 국내 전체 은 생산량의 50% 이상을 차지했다.

정부가 주요 광산에만 지원하던 갱도 건설 자금이나 탐광 자금 등 각종 수혜도 부평은광에 쏠렸다.

민가 2채만 있을 뿐 황량하기 짝이 없던 광산 주변에도 인부가 몰리는 '골드러시' 현상이 발생했다. 주변 도시에서도 광산에서 일하려는 노동자들이 유입됐다.

광산 노동자들 사무소는 지금의 부평구 간석동·만수동·부평동에 자리 잡았다. 선광장·변전실·사무실·창고·화약고 등 각종 부대 시설 인근에 있던 지역상권도 자연스럽게 발달했다.

부평은광이 최대 생산량을 기록한 1970년대 중반 광산에서 일하는 직원은 약 500명에 달했다.

폐광 전까지 부평광산에서는 총 400만t을 채광해 50만㎏에 달하는 은 정광을 생산해냈다.

그러나 흐드러지게 핀 꽃이 지듯 부평은광의 호황도 쇠락을 맞았다.

광산을 운영하던 영풍기업은 1984년부터 3년 내리 적자를 기록했다. 이후 끝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987년 부평은광을 처분했다.

일자리를 찾으러 광산으로 왔던 노동자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한때 가장 흥성했던 부평은광 주변은 낙후한 원도심으로 변했다.

광산 주요 작업장이었던 영풍기업 사무소 부지에는 1990년대 이후 아파트가 들어섰다. 갱도 입구는 인천가족공원으로 탈바꿈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광산의 역사가 50여년 만에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인천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부평은광을 새로운 관광 명소로 조성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시는 올해 3억여원을 들여 갱도 안전도 검사를 위한 용역조사를 하고 그 결과 안전성이 검증되면 이곳 갱도를 관광지로 꾸민다는 방침이다.

인천시 관계자는 9일 "1990년대 초반 광산 갱도가 무너진 적이 있어서 안전성 여부를 우선 검토하고 있다"며 "남아 있는 은광의 역사성을 재조명해 관광자원으로 재활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계획을 세우는 중"이라고 말했다.

chams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