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북미대화 앞서 타협 의지"…핵신고-종전선언 협상 주목
폼페이오 방북 취소로 난기류 만났던 한반도 정세 긍정적 흐름

(서울=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 북한이 정권수립 70주년 기념일(9·9절)인 9일 개최한 열병식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등장시키지 않은 것은 대미 유화적 메시지로, 이를 계기로 교착 상태의 북미협상이 재개 쪽으로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방북 취재한 외신과 우리 군 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이날 오전 10시께부터 약 두 시간 동안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을 개최했는데, 지난 2월 건군절 열병식 때까지만 해도 모습을 드러냈던 '화성-14'형과 '화성-15'형 등 ICBM급 미사일이 등장하지 않았다.

사실 사거리가 1만㎞ 이상 되는 ICBM급 미사일은 미국 본토도 겨냥할 수 있어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로서도 위협으로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열병식에 내보이지 않은 것은 미국을 타깃으로 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달 중 예정된 남북-한미 정상회담을 통한 북미 교착 상황의 돌파구 찾기가 모색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이런 열병식 메시지가 긍정적인 신호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ICBM을 등장시키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분석해봐야겠지만 ICBM이 나오면 미국 여론이 들끓었을 것이 분명하니 좋은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은 된 것 같다"며 "다음 주 남북정상회담 등을 앞두고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것 같다"고 평가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북미 간 싱가포르 선언(6·12 정상회담 합의문)까지 한 마당에 정상회담 전과 후가 다르다는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는 자신감의 표현으로도 봐야 한다"며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서로 존중하고 신뢰한다고 한 마당에 김 위원장 입장에서 비핵화 의지를 재확인하면서 상대에 대한 배려와 신뢰의 선(先) 행동을 보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18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될 남북정상회담과 향후 북미 고위급회담에서의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한 협상을 염두에 두고 북한의 타협 의지를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만약 북한이 오늘 열병식에 다시 ICBM을 가지고 나왔다면 김 위원장의 비핵화 협상 의지에 대해 많은 의구심이 제기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본부장은 더 나아가 "김 위원장이 이번 열병식에 ICBM을 가지고 나오지 않음으로써 향후 남북 및 북미협상에서 북한의 ICBM 폐기 및 해외 반출 문제가 우선으로 거론될 가능성이 커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관측통들은 지난달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 취소 이후 난기류를 만난 듯했던 한반도 정세가 우리측 특사단의 지난 5일 방북 이후 다시 정상 항로를 찾아가는 흐름 속에서 ICBM이 없었던 9·9절 열병식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특히 트위터와 친서를 통해 북미 정상이 상호 신뢰를 확인한 직후라는 점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김 위원장은 방북한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단에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표하며 트럼프 첫 임기 내 비핵화 달성이라는 시간표를 제시한 사실이 공개된 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로 "함께 해내자"고 화답한 데 이어 김 위원장이 자신에게 친서를 보낸 사실을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폼페이오 장관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등 '2인자' 그룹의 협상에서 진전을 보지 못한 터에 북미가 '톱다운'(Top down, 정상이 합의한 뒤 하급자들이 후속 협의 및 이행을 하는 것) 방식을 다시 가동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런 터에 김 위원장은 미국 여론을 자극해 트럼프 대통령을 궁지로 몰 수 있는 ICBM 과시를 자제함으로써 트럼프 대통령에게 적극적인 대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관심은 북미 고위급 대화 재개로 현재의 흐름이 이어질지에 쏠린다. 남북 및 한미 정상회담을 통한 우리 정부의 중재 외교 속에 북미가 종전선언과 핵 신고 등 비핵화 조치의 선후를 둘러싼 이견을 극복하고 타협안을 만들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번 취소했던 폼페이오 장관의 재방북 또는 극적인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가능해지려면 종전선언과 핵 신고 등 비핵화 초기조치에 대한 구체적 이행 방안이 나와야 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10∼12일 처음 방한하는 스티븐 비건 신임 미 대북정책특별대표도 그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탐색할 전망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ICBM 없는 열병식은 9·9절 중국 축하 사절로 수뇌부 인사인 리잔수(栗戰書)가 방북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 예상이 됐지만, 오히려 김 위원장이 육성 연설을 하지 않은 것이 더 의미가 있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신 센터장은 이어 "그것은 정권수립 70주년 9·9절의 의미를 낮춘 것으로서, 김 위원장이 경제 및 대외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기에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핵 신고 등에서 전향적인 입장을 밝힘으로써 돌파구를 만들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jhc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