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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1) '대한독립만세' 주권재민의 기틀되다

송고시간2019-01-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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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식민지배·복잡한 국제정세 속 분노ㆍ열망 '만세 운동'으로 폭발

'국체 변화' 역사성 걸맞게 "3ㆍ1(기미)혁명으로 승격해야" 목소리도

[※ 편집자주 =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의 분수령이 된 최대규모의 항일운동이었습니다. 만세 운동 직후 일제통치에 대한 조직적 저항의 필요성을 절감한 뜻있는 애국지사들이 모여 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연합뉴스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관련 쟁점을 분석하는 한편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삶과 국내외 역사 유적 등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4월 중순까지 연재할 예정입니다.]

서울 광화문에서 진행한 순국선열 재현 퍼포먼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 광화문에서 진행한 순국선열 재현 퍼포먼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100년 전 1919년은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에서 분수령이 된 격변의 해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주권을 상실한 한국인들은 그해 3월 1일 일제히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임시정부가 국내외에서 잇따라 만들어졌다.

비록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자주독립이라는 결실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일제는 식민지배에 집단 반발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통치 방식을 온건하게 바꾸고 유화 정책을 펼쳤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이미 1919년 이전에도 혼란스러웠다. 가장 큰 사건은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이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4년간 유럽 대륙을 전장으로 바꿔놓았다. 결국 3천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뒤 연합군과 독일이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막을 내렸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1918년 연두교서에서 종전 조건으로 제시한 14개조 평화원칙을 통해 각 민족이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했다.

윌슨 대통령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이 보유한 식민지를 처리하는 원칙이었으나, 독립을 염원하던 '순진한' 한국인들은 윌슨 대통령에게 식민지배의 부당함을 알리고 독립 필요성을 기술한 청원서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러시아에서는 이에 앞서 1917년 사회주의 사상 전파와 계급 투쟁을 목표로 삼은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와는 별개로 일제 무단통치는 점점 가혹해졌다. 한국근현대사학회가 엮은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에 따르면 한반도에 배치한 헌병은 1910년 653개소, 2천19명에서 1918년 1천48개소, 8천54명으로 대폭 늘었다. 경찰도 같은 기간에 481개소, 5천881명에서 738개소, 6천287명으로 증가했다.

일제는 민족산업 발전을 가로막고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는 조처를 잇달아 단행했다. 일례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재정 확보와 세원 조사, 일본인의 한국 토지 점유를 위해 진행한 토지조사사업이다. 이로 인해 농지는 두 배 가까이 확대됐으나, 조선총독부는 곳곳에 있는 토지를 무상 취득하면서 단번에 국내 최대지주로 부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9년 1월 21일 조선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덕수궁에서 숨을 거뒀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아들 순종에게 황위를 넘긴 고종의 죽음에 많은 사람이 슬픔에 잠겼고,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저항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일본에 머물던 유학생들은 1918년 12월부터 독립운동 추진을 결의하고, 국내외 인사를 만나 계획을 전했다. 이듬해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조선청년독립단 대회에 참가한 유학생 600명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3·1운동은 이처럼 복잡한 국내외 정국과 맞물려 한국인들이 그간 표출하지 않은 밑바닥의 분노와 열망이 일순간에 폭발한 대사건이었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는 학술지 '역사와현실'에 게재한 논문 '3·1운동 원인론에 관한 성찰과 제언'에서 3·1운동 배경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도 교수는 "구조적으로는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 조선을 일본 통치에 적합하게 바꾸기 위해 강행한 근대적 제도와 법령으로 축적된 분노가 밑바탕에 깔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쌀값 폭등으로 부를 축적한 지주층과 다수 민중의 지지를 확보한 종교 지도자의 정치적 부상 욕구가 존재했고, 민족 독립을 촉발하는 국제정세가 형성됐다"며 "이러한 요소들이 상호 작용해 대규모 민중 봉기가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3·1운동 때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던 목판
3·1운동 때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던 목판

[연합뉴스 자료사진]

3·1운동이 지니는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일부 학자들은 최근 이낙연 국무총리가 제안한 것처럼 '3·1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윤경로 한성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12월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3·1운동은 당시에 소요 혹은 폭동이었다"며 "기존 체제를 전복한 혁명은 아니지만, 주권재민 국가를 세우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만으로도 혁명으로 지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3·1운동의 목적은 독립 요구였다"며 "청을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을 참고한다면, 임시정부까지 포함해 기미혁명(己未革命)이라고 부르는 안을 고려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1919년은 단군 이래 군주에게 있던 주권이 국민에게 넘어온 의미 있는 해이고, 3·1운동은 혁명적 사건임이 틀림없다"며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성을 생각하며 100주년을 맞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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