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 82명의 혁명군을 태운 배가 멕시코에서 쿠바를 향해 출발한 것은 1956년 11월 25일이었다. 이 가운데 70명은 늪지대에 상륙하는 과정에서 익사하기도 하고, 정부군의 매복에 걸려 죽거나 체포됐다. 남은 12명이 바티스타의 철권통치를 무너뜨리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모한 도전으로 비쳤다. 그러나 이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지지 세력을 불려나가는 한편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으로 정부군에 타격을 입혔다. 체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이 1958년 12월 29일 중부 도시 산타클라라에 입성하자 바티스타는 1959년 1월 1일 새벽 수억 달러의 재산을 챙겨 도미니카로 도주했다. 이날 오후 6시 카스트로는 제2의 도시 산티아고데쿠바를 함락했고 체 게바라는 이틀 뒤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2019년 1월 1일로 60주년을 맞는 쿠바 혁명은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여기서 시작된 공산 혁명의 물결이 중남미 전역으로 번졌고, 1962년 소련이 미국의 앞마당인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다가 3차대전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철천지원수처럼 지내던 미국과 쿠바는 동서 냉전이 종식되면서 차츰 문호를 열어가다가 2015년 마침내 국교를 정상화하기에 이르렀다.

쿠바 혁명의 주역 가운데는 우리 동포도 있었다. 주인공은 헤로니모 임(Geronimo Im), 한국 이름은 임은조로 이민 2.5세다. 1926년 태어난 그는 쿠바 마탄사스 종합대에 입학해 한인으로는 처음 대학생이 됐다. 수해가 일어났을 때 부패한 관리들이 구호품을 빼돌리는 걸 보고 동료 학생들을 규합해 항의 집회를 열었다가 구속됐다. 출감 후 아바나대 법학과로 옮겼고, 여기서 동갑내기 피델 카스트로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임은조는 카스트로와 함께 시국 토론에도 참여하고 시위도 벌이며 우정을 쌓고 투쟁 의지를 다진다. 임은조는 5년제인 법학과 졸업을 1년 남겨둔 1949년 진보정당 오르토독소당에 가입한 뒤 10년 동안 아바나에서 지하투쟁을 벌인다. 카스트로도 오르토독소당에 입당하고 멕시코로 망명했다가 혁명군을 이끌고 쿠바로 상륙한다.

임은조는 혁명정부 경찰청에서 인사·법무담당관을 지내다가 1963년 산업부 인사담당관으로 옮겨 당시 산업부 장관이던 체 게바라와 4년간 함께 일한다. 임은조는 1988년 식량구매국장을 끝으로 정부에서 물러난 뒤에도 아바나 근교 키테라스 시장에 선출된 데 이어 차관급인 동아바나 인민위원장으로 뽑혀 한인으로는 최고위직에 오른다. 쿠바 정부는 최고 훈장 등 10여 개의 훈장을 수여했다. 은퇴 뒤에는 정부로부터 선물 받은 소련제 라다 승용차로 택시 운전을 하며 한인 후손들을 모아 한인회를 조직하고 한글과 한국 문화도 가르쳤다.

임은조의 민족애와 혁명을 향한 열정은 아버지 임천택(에르네스토 임)이 물려준 것이었다. 1903년 경기도 광주 태생인 임천택은 1905년 4월 홀어머니 품에 안겨 1905년 4월 멕시코행 배에 올랐다. 1천33명의 대한제국 국민이 영국계 멕시코인과 일본인 브로커에 속아 선박용 밧줄 원료인 에네켄(용설란) 농장으로 농업이민을 떠난 것이다. 그곳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신세로 강제노동을 했다.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모국은 식민지로 전락했고 돌아갈 여비도 없어 대부분 멕시코에서 재계약해 생계를 이어갔다. 이 가운데 288명은 1921년 쿠바로 옮겨갔다.

쿠바 한인들도 미국 신문이나 재미동포들의 서신 등을 통해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해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접했다. 이들은 1923년 3·1운동 4주년을 맞아 만세운동을 펼치는가 하면 해외 독립운동단체 대한인국민회의 쿠바지회를 결성했다. 임천택은 쿠바지회의 서기·총무·회장·고문을 역임하는 한편 국어학교와 청년학원을 열어 한국어를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그가 여러 차례 모금 활동을 벌여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낸 사실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기록돼 있다. 1941년부터는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에 '쿠바 이민사'를 연재한 뒤 1954년 책으로 펴냈다. 1985년 세상을 떠났고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임천택을 비롯한 쿠바 이민 1세대는 아무도 살아서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쿠바 공산정권 수립으로 한국과의 교류가 단절됐기 때문이다. 고국을 떠난 지 99년 만인 2004년, 임천택의 유해는 임은조의 품에 안겨 봉환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1967년 북한 정부의 초청을 받아 평양·원산·금강산 등을 방문하고 1995년 서울에서 열린 광복 50돌 세계한민족축전에 참석했다.

임천택은 부인 김귀희 사이에 9남매를 두었다. 쿠바 혁명정부가 무상교육을 하기 전에 임은조의 동생들도 모두 대학 교육을 받았다. 마탄사스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임천택의 3녀 마르타(임은희)는 현지인 남편과 함께 2000년 '쿠바의 한인들'을 출간했다. 임은조의 장남 넬슨은 오리엔테주 종합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2006년 경희대 국제교육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돌아갔다.

임천택의 증손녀 아자리아 임은 2013년 쿠바 유학생 1호로 한국에 들어와 대전 한남대 린튼글로벌칼리지를 졸업하고 현재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증손자 넬슨(임운택)과 카를로스(임미남)도 각각 지난해와 올해 재외동포재단의 '멕시코·쿠바 한인 후손 초청 직업 연수'에 참가해 3개월간 요리와 제과·제빵 기술을 배우고 한국 문화를 체험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한국과 쿠바가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다. 정식 국교는 맺지 않았지만 코트라 아바나무역관이 2005년 문을 연 가운데 쿠바를 방문하는 한국인이 2017년 1만 명을 넘겼고, 한국이 쿠바의 무역 대상국 10위 안에 들 정도로 교역도 활발하다. 쿠바의 젊은이들은 K팝에 열광하고 있으며 쿠바를 배경으로 한 송혜교·박보검 주연의 tvN 드라마 '남자친구'가 11월 28일부터 인기리에 방송 중이다. 쿠바 혁명 60주년을 맞아 임천택과 임은조 부자의 발자취가 양국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다면 두 나라의 우호가 더욱 두터워지지 않을까 싶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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