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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10) 맨손만세에서 돌ㆍ몽둥이든 항거도

송고시간2019-01-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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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ㆍ안성 등지서 주재소 공격, 시위대에 총질한 순사 처단…"정당방위 성격"

"만주ㆍ러 무장투쟁 前단계…비폭력시위ㆍ무장투쟁 입체적 조명 필요"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3ㆍ1운동은 비폭력 만세운동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경기도 수원, 안성, 경상도 함안, 창녕, 평안도 강서 등지에서는 면사무소ㆍ주재소(파출소) 방화, 일본 순사 처단 등 다분히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만세운동이 있었으며 이는 만주와 러시아의 무장투쟁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흉기로 난자당해 숨진 일본 순사 얼굴의 창상 부위 스케치.
흉기로 난자당해 숨진 일본 순사 얼굴의 창상 부위 스케치.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조선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던 화수리 주재소의 일본 순사 가와바다(川端)는 1919년 4월 3일 주재소를 습격한 주민들에게 총을 들고 저항했으나 집단 구타를 당한 끝에 두개골절 출혈로 숨졌다. 오른쪽에 검시관이 쓴 것으로 보이는 '안면 두부의 손상(顔面頭部之損傷)' 글귀가 보인다. <사진 수원대 박환 교수, 출판사 '민속원' 제공> 2019.1.15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14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3·1운동이 '서울 중심의 평화만세 시위'가 아니라 전국 각계각층이 참여한 생존권 차원의 투쟁이 있었고, 일제와 적극적인 정면대결이 벌어졌음을 입증해주는 새로운 자료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면서 3·1운동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수원군(현 수원시) 송산면 사강리와 우정면 화수리, 안성의 양성, 원곡 지역 등지에서 공격적인 만세운동이 있었지만, 제암리 학살사건 등에 묻혀 실체가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면서 이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밝혀내기 위한 심층 연구와 조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경기도에서는 3·1운동 당시 21개 부와 군 등 전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고, 3∼4월 2개월간 총 225회의 시위가 전개됐다. 이는 경기도가 남북으로 철도, 도로가 관통하는 요충지이고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지켜본 뒤 고향에서 비슷한 투쟁을 주도한 때문으로 분석된다.

정면대결 양상의 시위가 경기도 곳곳으로 확산했음을 보여주는 그림
정면대결 양상의 시위가 경기도 곳곳으로 확산했음을 보여주는 그림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3ㆍ1 만세운동 후 3월과 4월 수원, 안성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서 면사무소 방화, 주재소 습격 등 공세적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 수원대 박환 교수, 출판사 '민속원' 제공> 2019.1.15

'적극적 시위'의 사례로는 3월 26일 수원 송산면 만세시위에 이어 28일 벌어진 사강 주재소 순사 살해 사건이 꼽힌다. 홍효선과 함께 시위를 이끈 홍면옥이 동생 홍준옥(면서기), 예종구 등 시위대 200∼300명을 모아 주재소를 습격해 도망치던 일본 순사 노구찌를 곤봉으로 구타해 처단한 것이다.

박 교수는 경기도 지역의 이 같은 공격적 만세운동에 대한 연구가 미진했던 이유로 "기존의 연구들이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상징되는 '탄압과 희생'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라면서 "경기 남부지역의 정면대결 시위는 만주와 러시아 등 무장투쟁의 전 단계로써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3·1운동기념사업회장인 이정은 박사도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경상도, 경기도(고양) 등지의 만세 시위운동 연구 결과를 인용해 "만세운동 초기에 비폭력 양태를 띄었던 시위들이 일제 통제력이 약하거나 시위대 동원 역량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공세적으로 전환됐다"고 설명했다. 만세운동이 어느 수준의 강도를 띄었는지는 지역사회의 저항력과 조직력의 세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은 "일제의 억압과 수탈이 심한 곳에서 강한 저항이 일어났다"고 보았던 기존의 연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박사는 "그동안 지방 사회상에 대한 연구 부족으로 이런 가설이 통할 수 있었다"면서 "그러나 화성과 안성 등지와 같이 일제가 독립운동의 숨을 완전히 끊어 놓지 못한 곳에서는 독립전쟁과 같은 양상으로 전개된 점에 비춰볼 때 시위 동원력이 공격적 시위의 큰 동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사연구회 주관으로 지난해 12월 7일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3ㆍ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자료집에 따르면 공세적 시위가 가장 강했던 곳은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이다. 주민 1천명이 횃불을 들고 '만세 고개'를 넘어 20리(8km) 길을 행진해 양성으로 쳐들어간 뒤 "일본인들을 완전히 몰아내자"는 함성과 함께 면사무소와 우편소, 주재소, 일본인 상점들을 가차 없이 불태웠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이어 새벽녘에 원곡으로 이동, 면사무소를 불태웠다.

박 교수와 이 박사는 공세적 시위로의 전환 배경에 대해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격화에 따른 생존권 차원"(이정은 박사), "정당 방위적 성격"(박환 교수)으로 설명했다.

3월4일 있었던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장터 시위에서도 일제 순사들이 매복해 있다가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대가 돌을 던져 주재소 소장과 조선인 헌병보조원 등을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이 또한 자위권 차원의 대응이었다고 박 교수는 밝혔다.

의병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한 사진
의병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한 사진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프랑스 국제영화사가 '20세기의 십자가형(CRUCIFICATION AU XX SIECLE)'을 제목으로 공개한 1919년 경기도 남부 지역에서 처형된 의병 사진. <사진 수원대 박환 교수, 출판사 '민속원' 제공> 2019.1.15

그러나 폭력성을 띤 공격적 시위가 벌어진 지역에서도 일본 상인이나 부녀자를 상대로 한 무자비한 보복 살해는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정은 박사는 "양성면 주재소 습격 시 순사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고 해치지는 않았으며, 당시 우편소 소장의 도움으로 산으로 대피하던 일본인 여성들에게도 일절 해코지를 하지 않는 등 절제된 시위 양상을 보인 것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윤경로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명예교수는 "일부 지역에서 공세적 시위가 있었고, 이것이 결국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이어졌다"면서도 "그러나 일본 상인이나 부녀자 등을 상대로한 대규모 살상이 없었던 것은 3ㆍ1운동의 평화적 시위 기조를 지키려 애쓴 것으로 평가할만하다"고 말했다.

duckhw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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