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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7) 북녘땅 만세운동 '성지' 평양·맹산

송고시간2019-01-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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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연대시위 서막 올린 평양, 사망자 656명으로 北 최다

제암리보다 먼저 발생한 '맹산 학살'…분견소 가두고 54명 사살

(서울=연합뉴스) 홍국기 기자 = 1919년 3월 1일 서울과 더불어 평양·진남포·안주·선천·의주·원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1운동 첫날 시위가 있었던 7곳 가운데 서울을 제외하고 6곳이 모두 북녘땅이다.

3월 초순 북측 지역에 집중됐던 만세시위는 같은 달 중순께부터 중남부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전국화했다.

그만큼 3·1운동 시위는 초기에 북측 지역이 남측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참여도가 높았고, 희생자도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한 북한 만세운동의 '성지'는 그간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3.1운동도
3.1운동도

3.1운동당시의 자주독립의지와 민족역량을 그린 3.1운동도. [연합뉴스 자료사진]

역사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였던 평양의 시위가 서울 시위와 함께 전국적인 3·1운동을 촉발했다는데 이견이 없다.

3월 1일 서울의 시위가 학생 주도로 이뤄졌다면, 평양의 시위는 종교계가 주도했다.

당일 오후 1시 평양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고종 봉도식을 개최한 뒤 시내에서 연대시위를 펼쳤다.

세 방면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오후 3시께 평양경찰서 앞에서 하나의 대오를 형성했다. 이런 소식이 퍼지자 평양 인근 지역과 학교에서도 시위대를 조직해 시내로 진출했다.

해 질 무렵에는 낮에 모인 숫자의 2배가 넘는 시위대가 평양경찰서 앞에 집결해 경찰과 대치하면서 시위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일본 경찰은 시위대가 던진 돌에 경찰서 유리 창문이 깨진 것을 빌미로 군부대와 합동으로 시위 참가자 검거에 나섰다. 그런데도 9일까지 매일 평양에서는 상점과 학교가 문을 닫은 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의 논문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 연대의 힘'에 따르면 당시 평양에서 8일까지 이어진 검거로 400여명이 체포되고, 이 가운데 48명이 기소됐다.

김 교수는 "평양의 만세시위는 기독교와 천도교의 연대로 성사됐다"며 "학생들은 학교 간 상호 연대가 아니라 교내 기독교 계파 간 연대를 통해 시위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첫날부터 평양에서 시작된 종교 연대시위와 종교와 학생 간 연대시위 방식은 이후 만세시위에 영향을 미쳐 곳곳에서 이런 양상의 연대시위가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백암 박은식 선생이 집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평양에서 3·1운동으로 총 656명이 사망해 북측 지역에서 최다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평양에 이어 함경남도 고원(489명), 평안북도 삭주(300명), 평안남도 맹산(253명), 평안북도 벽동(236명) 순으로 사망자 수가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사장은 "천도교와 기독교 교세가 강했던 북한 지역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3·1운동이 확산했다"며 "여기에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점을 고려하면 평양이 3·1운동 성지로 빠질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북한서 2009년 발행된 3.1운동 90주년 기념우표
북한서 2009년 발행된 3.1운동 90주년 기념우표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일제의 3·1운동 탄압 사례 가운데 경기도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은 극악한 만행으로 꼽힌다.

제암리 학살은 1919년 4월 15일 3.1운동이 거세게 일었던 제암리 일대 양민들을 교회에 모아 놓고 밖에서 문을 잠가 불을 지른 뒤 집단 총격을 가해 23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남측 지역에서는 제암리를 3·1운동의 '성지'로 여긴다.

제암리교회 3·1운동 순국기념관
제암리교회 3·1운동 순국기념관

촬영 안철수

그러나 이보다 앞서 평남 맹산에서는 더 끔찍한 일제의 학살이 자행됐다.

맹산에서는 3월 6일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첫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초기 시위는 비교적 평온하게 끝났다.

그러나 맹산헌병분견소장은 3월 10일 천도교인 약 100명을 맹산공립보통학교 앞에 모이도록 한 뒤 그 가운데 시위 주모자 4명을 체포했다.

이에 천도교인을 포함한 200여명은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고, 분노한 시위대가 분견소 안으로 밀고 들어가자 헌병과 경찰들이 이들을 가두고 발포했다.

이 자리에서 51명이 즉사했고, 3명이 부상한 채 탈출했으나 결국 사망했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제암리 학살보다 한 달여 먼저 발생한 맹산 학살은 3·1운동사에서 단일 시간·장소 기준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맹산 민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그 이튿날부터 매일 산발적인 시위를 이어갔다. 밤에는 산에 올라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헌병과 경찰을 괴롭혔다. 맹산에서 3·1운동에 의한 사망자는 총 253명, 부상자는 250명에 달했다.

redfla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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