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우리 대한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를 우리 자손 민중에 대대로 전하기 위해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에서 벗어나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1919년 2월 1일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 도입부를 요즘 쓰는 말로 의역한 것이다. 한 달 뒤 3·1절에 발표된 기미독립선언과 구별해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1919년 2월 1일은 음력으로 무오년이 아닌 기미년 1월 1일이다. 동지를 규합하고 서명이 이뤄진 것은 무오년이어서 그렇게 불린다는 설이 지배적이나 1918년 11월에 발표됐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보훈처는 2월 1일을 기념일로 삼고 있다.

국한문 혼용체인 무오독립선언서는 35행 1천723자에 이르고, 석판에 글씨를 새겨 인쇄했다. 삼균주의를 주창하고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지은 조소앙이 선언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선언은 이광수가 기초한 2·8 독립선언이나 최남선이 작성한 3·1 독립선언보다 내용이 훨씬 강경하다.

"일본의 합방 동기는 그들의 소위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실행함이니 이는 동아시아의 적이요,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와 무력폭행을 구비하였으니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일본의 합병 결과는 군경의 야만적 힘과 경제의 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억압하고 핍박하며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 문화를 저지하고 장애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라며 일본의 죄상을 꾸짖은 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라고 독립군의 궐기와 육탄혈전(肉彈血戰)을 촉구하고 있다.

무오독립선언에 연서한 인물들은 실제로도 치열하게 독립투쟁에 나섰다. 조소앙을 비롯해 김교헌·김규식·김약연·김좌진·이동녕·이동휘·이범윤·이상룡·이승만·이시영·문창범·박은식·신채호·안정근·안창호 등 서명자 39명의 평균연령은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보다 5세가 낮은데도 3분의 2 이상이 일제강점기에 순국한 까닭에 살아서 광복을 맞은 인물은 11명에 지나지 않는다.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는 33인 가운데 15명이 광복까지 생존했다.

무오독립선언 39인 중에서는 변절자도 이탁(본명 이용화) 한 명밖에 없다.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가운데는 박희도·최린·정춘수가 변절했고 선언문을 쓴 최남선도 친일파로 변신했다. 2·8 독립선언 서명자 11명 중에서도 이광수·서춘 등이 일제에 협력했다.

학계에서는 무오독립선언이 시기적으로 가장 앞섰을 뿐 아니라 선언 직후 조소앙이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인 백관수·이광수 등을 지도해 2·8 독립선언을 발표하도록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선언의 영향을 받아 서울에서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이 거사를 준비했고 3·1운동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었다.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도 무오독립선언 참가자들이 주축을 이뤘다.

노귀남 중국 옌볜(延邊)대 인문사회과학학원 객좌연구원은 "선언에 참여한 인물의 이름이 가나다순으로 적혀 있는데 중간에 순서가 안 맞는 것 등을 보면 서명을 받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한 곳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오독립선언이 다른 독립선언과 구분되는 점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라며 "이러한 정신이 이듬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로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그러나 2·8 독립선언의 도화선이자 3·1운동의 기폭제였고, 임시정부의 산실이자 무장독립투쟁의 토대가 된 무오독립선언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교과서에도 2·8 독립선언은 나오지만 무오독립선언은 언급조차 없다.

무오독립선언에 대해서는 발표 시기는 물론 발표 장소도 고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조소앙 자서전에 '지린성성'(吉林省城)이라고 기술된 것을 근거로 지린성 지린시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지린성 허룽(和龍)현의 대종교 총본사를 발표 장소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국내 인사로 이뤄진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의 종교별 구성은 기독교(개신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인 데 비해 만주와 연해주에서 주로 활동하던 무오독립선언 서명자의 가운데 16명이 대종교인이었다(30명으로 높여 잡는 학자도 있다). 또 39인 가운데 10명은 이름만 전하고 얼굴 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

랴오닝성 선양(瀋陽)에서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선양협의회 주최로 해마다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이 열린다. 국내에서도 삼균학회가 매년 기념식과 학술대회를 마련하고 있다. 제79회 순국선열의 날인 지난해 11월 17일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한인회관에서는 단둥한인회와 단둥한국문화원 주최로 무오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2018년 11월 무오독립선언 발표설에 맞춰 행사를 마련한 것이다.

며칠 뒤면 국내에서도 기념행사가 열린다. 무오독립선언의 의미와 성과를 재평가하고 참여자들의 발자취를 확인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당국의 지원과 국민의 관심을 기대한다. 100주년을 맞은 올해도 무심하게 넘어간다면 무오독립선언에 앞장섰던 선열들이 불호령을 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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