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저는 국제비즈니스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고려인 동포 4세 김율랴입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저는 일자리를 찾으러 다니는 엄마를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키르기스스탄으로 또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다니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중략) 저에게는 어쩌면 지금이 제일 행복합니다. 그런데 요즘 또 친구들이 저에게 말합니다. 고려인 동포 4세는 스무 살이 되면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어디로 가야 할지 왜 가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한국어로 한국말을 못해 어려워하는 고려인들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제 친구들이 더 이상 비자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이는 2017년 5월 20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글로벌다문화센터에서 열린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국민위원회' 출범식에서 김율랴 양이 공개한 '대한민국 어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다. 김 양은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기억과 동행위원회'가 그해 6월 9일 오후 서울 세종로 국민인수위원회에 고려인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할 때도 이 편지를 낭독했다.

현행 재외동포법 시행령은 재외동포를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국외로 이주한 동포를 포함한다·이하 동일)로서 외국 국적을 취득한 자'와 '부모의 일방 또는 조부모의 일방이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로서 외국 국적을 취득한 자'라고 규정해 4세 이후는 외국인과 동일하게 취급해왔다. 동포 대상의 방문취업비자(H-2)나 동포비자(F-4)를 받아 입국하면 일반 외국인보다 체류 자격이나 각종 사회복지 분야 등에서 혜택을 볼 수 있다.

동포 4세라 해도 미성년자는 방문동거비자(F-1)를 받아 부모와 함께 한국에 체류할 수 있지만 만 19세가 되면 유학비자(D-2)를 받아 재입국하든가 고용허가제에 따른 비전문취업비자(E-9)로 다시 들어와야 한다. 그러나 장학제도 부실과 한국어 능력 부족으로 대학 진학의 문턱이 높아 유학비자를 받는 게 쉽지 않은 데다 방문취업비자는 만 25세가 돼야 한다. 만 19∼24세 때는 대학에 못 가면 가족과 헤어져 살든가 90일짜리 관광비자로 들락날락하는 수밖에 없다. 관광비자로 오갈 경우 항공료가 큰 부담일 뿐 아니라 국내 취업도 할 수 없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황 마리아 씨의 아들은 불법체류 상태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고를 당해 산재보험이나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안타까운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러시아 출신의 차가이 안드레이 씨는 거주지가 그나마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여서 3개월마다 비자 스탬프를 찍으러 왔다갔다 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김 나제즈다 씨는 비싼 보육비 탓에 아이를 보육시설에 보내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1999년 재외동포법이 제정될 때만 해도 3세까지만 재외동포로 인정하는 규정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회주의권 국가 동포를 대상으로 2007년 방문취업제도에 이어 2012년 동포비자제도가 시행되면서 러시아를 포함한 CIS 동포(고려인)와 중국 동포(조선족)의 국내 귀환이 많이 늘어나자 현안으로 대두됐다. 19세기에 집단이민의 역사가 시작된 이들 지역 말고는 4세까지 내려간 사례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국내로 귀환하는 동포도 거의 없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로 한국어를 잊어버린 고려인들이었다.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은 2017년, 국내 귀환 고려인과 시민단체 등은 재외동포법과 고려인특별법 개정운동에 나섰고 국회에서도 개정법이 여러 건 발의됐다. 경기도 부천의 고교생 이가영 양은 "고려인 친구들은 어릴 적부터 한민족이라고 생각해왔고 한국을 모국이라고 믿고 살아왔는데, 동포가 아니라고 하며 나가야 한다니 그들은 이제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느냐"란 요지의 글을 포털 사이트에 올려 서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정부는 법 개정 이전에라도 인도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그해 9월 12일부터 2019년 6월까지 한시적으로 방문동거(F-1) 자격을 부여하기로 했다. 법무부는 2017년 8월 기준으로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4세 이상 동포는 2만7천560명으로 추산했으며, 2018년 12월까지 516명(대부분 고려인)이 혜택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한시 조치였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강제이주 80주년이 끝나자 법 개정 논의도 잠잠해졌다. 한시 조치의 만료 시점이 다가오자 정부는 "올해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점을 감안해 고려인 동포 등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안정적인 국내 체류를 지원하고자 재외동포법 시행령의 3세 제한 규정을 없애고 직계비속으로 전면 확대하는 개정안을 지난 23일 입법예고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이와 함께 "이들의 한국 사회 적응을 위해 한국어 교육을 포함한 사회통합 프로그램 참여 의무화를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대한고려인협회(회장 노 알렉산드르)와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대표 신은철)는 환영의 뜻을 나타내면서도 "국내 귀환 고려인 동포들은 체류자격 문제 말고도 언어·교육·주거·노동·의료 등 거의 모든 생활 분야에서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면서 처우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당부했다. 고려인특별법은 해외 거주 동포만 지원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재외동포법도 무국적자와 국내 귀환 동포 등에 대한 지원 규정이 미비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러나 국내 고용시장의 문제를 들어 재외동포 자격 확대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병역·납세·건강보험 등을 놓고 내국인 역차별 논란도 빚어진다. 시행령 개정안을 소개하는 기사에도 "자국민은 안중에도 없구나. 이러니 저소득층이 어려워지고 자살이 늘어나는 거다", "하여튼 이 나라는 민족 팔이, 동포 팔이면 다 돼요", "수입산 혼혈 뻥튀기들 많이 생기겠네",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동포?", "한국인 부담이 더 늘겠네요. 저 사람들 한국에 있을 때는 세금도 한국인과 동일하게 부과하세요" 등의 댓글이 달렸다.

고려인과 조선족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기근과 수탈을 견디다 못해, 혹은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고향을 떠난 사람의 후손이다. 더욱이 귀환 고려인은 대부분 우리말을 모르는 탓에 경제 사정이 매우 열악하고 자녀들의 학업에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한민국에 살고 싶다고 호소하던 김율랴 양도 지난해 12월 러시아로 이주했다. 4세대에 걸쳐 마르지 않는 고려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면서 어떻게 북녘 동포를 보듬고 외국 이주민까지 포용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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