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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기록을 보니'…광주 3·1운동사 오류 '바로잡기' 필요

송고시간2019-02-1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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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3·1혁명 100주년 학술세미나 개최…노성태 교사 발제문서 주장

광주 3·1만세운동 준비한 비밀 독서모임 '신문잡지 종람소' 회원의 모습
광주 3·1만세운동 준비한 비밀 독서모임 '신문잡지 종람소' 회원의 모습

[광주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 제공]

(광주=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광주 3·1 만세운동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이 잘못 알려져 바로잡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광주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오는 20일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광주·전남 3·1혁명의 재평가'라는 주제로 3·1혁명 100주년 학술세미나 개최한다.

발제자로 나선 광주 국제고 노성태 역사교사는 당시 판결문을 통해 광주3·1운동을 재구성한 결과를 발표한다.

노 교사는 19일 미리 공개한 발제문에서 "3·1운동의 주역 중 한명이었던 최한영 선생의 회고를 정리한 글이 '광주시사(1993)에 그대로 실렸고, 광주시사의 글을 다른 책들이 참고하면서 많은 오류가 생겼다"고 밝혔다.

최한영 선생의 회고담은 광주 3·1운동이 일어난 지 46년이 지난 뒤 쓰였고, 회고에 의존하다 보니 이름과 날자, 형량, 시위 경로 등이 당시 판결문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광주 3·1운동의 최초 시위 장소는 작은장터가 열리고 있는 부동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론 큰장터인 광주교 아래 모래사장에서 (시위)개시를 선포했다"며 "큰장터에서 시작해 약 500m 떨어진 작은장터 쪽으로 이동, 그곳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시위 경로 역시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기존엔 시위대가 서문-충장로-충장로파출소-금남로-구법원 앞-광주경찰서를 행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노 교사는 "시위대는 서문을 통해 충장로를 향해 행진했고, 북문 밖(현 충장로 4가)까지 나갔다가 농업학교 학생들과 합세해 다시 충장로로 돌아왔다"며 "충장로우체국까지 행진한 시위대는 일본 경찰이 진압을 시작하자 바로 옆에 있는 광주경찰서 앞마당으로 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당시 재판을 받은 103명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대학행 2명, 숭일학교 학생 24명, 수피아여학생 20명, 농업학교 학생 6명, 보통학교 학생 1명 등 학생이 53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최 선생의 회고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지만 판결문을 참고하지 않아 다소 오류가 있다"며 "광주 3·1운동의 재서술을 통해 광주시사를 바로잡는 일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발제자인 전남대 5·18연구소 임선화 연구위원은 "일제가 의병 전쟁으로 전남 지역의 감시를 더욱 강화해 3·1 만세시위가 사전에 발각된 경우가 많았다"며 "의병 전쟁으로 항일조직이 와해해 만세시위 규모가 작았다는 기존의 학설은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려인 인문사회연구소 김병학 연구위원은 "연해주 고려인들은 한반도의 3·1운동에 고무돼 본격적으로 항일무장 독립투쟁에 나섰다"며 "정당한 평가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i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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