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우리 조선 민족은 민족의 독립, 민족의 자유, 민족의 정의, 민족의 인도(人道)를 선언하노라. 우리는 4천 년 역사를 가진 나라요, 2천만 신성한 민족이었노라. 그런데 우리 역사를 시멸하고 우리 민족을 타파하여 기반(羈絆·굴레) 밑에 신음케 하며 농락 중에 고통케 함이 어언 16개 성상(星霜)을 열력(閱歷·여러 가지 일을 겪어 지내옴)하였다. (중략) 이제 천명을 이어 순종하고 인심을 합응하여 2천만 중의 한 입으로 일제히 자유의 노래를 부르며 두 손을 굳게 잡고 평등의 큰길로 전진하는 것이다.(하략)"

지금으로부터 꼬박 100년 전인 1919년 3월 13일 중국에서 발표된 '독립선언 포고문'이다. 그날 지금의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인 북간도 용정(龍井) 서전벌에서는 간도 전역의 한인 3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조선독립축하회가 열렸다. 정오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에 맞춰 대회 부회장인 배형식 목사가 개막을 선언하자 군중들은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회장 김영학은 김약연 등 17인이 서명한 포고문을 낭독하고 공약 3장을 선포했다.

이어 유예균, 배경식, 황지영 등이 차례로 연단에 올라 일제의 죄상을 규탄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대회가 끝나고 반일시위 행진이 펼쳐졌다. 명동학교와 정동학교 학생으로 구성된 충렬대(忠烈隊)가 앞장서고 군중이 뒤따르며 인근의 일본영사관으로 행진하자 중국 군경이 총칼로 저지했다. 시위대 가운데 10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부상했다.

나흘 뒤 수천 명이 모여 3·13 희생자들에 대한 추도회를 열었다. 지난달 27일 동북아평화연대 등의 주관으로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홍익인간재단 장우순 책임연구위원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3월 13일부터 5월 1일까지 만주 지역 31곳에서 연인원 12만5천520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만세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3월 17일 오후 4시 조선인 두 명이 문창범 대한국민의회 회장 등의 명의로 작성된 독립선언서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에 전달한 데 이어 신한촌의 한인들은 오후 5시 집에 일제히 태극기를 게양했다. 오후 6시부터는 학생들이 자동차에 나눠 타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내를 누볐다. 러시아 관헌들이 시위자 2명을 체포하고 신한촌의 태극기를 내리도록 하자 이튿날 아침 조선인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해 거세게 항의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니콜리스크(현 우수리스크)에서는 한인들이 3월 17일 아침 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3월 21일 한인들이 라즈돌노예역에 모여 일본 군대를 습격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러시아 민병대가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4월 7일 녹둔도에서도 태극기를 게양하고 1천여 명이 만세운동에 나섰고, 4월 9일 구사평의 이갑장 회갑연에서 2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3·1운동 소식은 태평양 건너 미주로도 전해졌다. 3월 10일부터 하와이 지역신문에 만세시위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동포들은 한인교회에서 연일 기도 모임을 연 데 이어 4월 12일 국민회 주최로 호놀룰루 근교 와이알라 한인기독학원에서 독립 경축대회를 개최했다.

미국 본토에서의 3·1운동은 서재필·이승만·정한경이 주도했다. 한인 지도자 150여 명은 4월 14∼16일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제1차 한인회의(한국의회)를 열어 일제 침략의 실상과 독립의 정당성을 알린 뒤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펼쳤다.

현재 리틀극장은 원형이 보존된 채 'Play & Players Theater'란 이름의 극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재필기념재단은 제1차 한인회의 90주년을 맞아 2009년 4월 극장 외벽에 영어와 한글로 된 기념 동판을 부착했다. 필라델피아한인회는 다음 달 12∼14일 100주년 기념일을 맞아 제1차 한인회의를 재현하고 만세운동 시가행진과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할 예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에서 "북간도 용정과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와이와 필라델피아에서도 우리는 하나였다"며 나라 밖에서도 만세시위가 펼쳐졌음을 상기시켰다. 3·1운동은 미주·만주·연해주·일본 등 국내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 준비했고 온 국민과 재외동포들이 하나로 뭉쳐 이뤄낸 쾌거다.

장우순 연구위원도 "3·1운동은 근대의 민족적 실체와 한민족 네트워크가 최초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민족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는 1909년 2월 1일 국민회란 이름으로 통합해 미주 3·1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그 성과를 발판으로 국민회는 이듬해 2월 대동보국회를 흡수해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했다. 이어 멕시코지방회, 시베리아지방총회, 만주지방총회 등을 구성해 재외 한인의 권익을 대변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 전 세계 179개국에 743만여 명의 동포가 살고 있고 한인회가 없는 나라가 없을 정도로 한민족 네트워크가 그물망처럼 깔려 있다.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는 74개국 147개 도시에 지회를 두고 있고 의사·변호사·과학자·언론인 등 재외동포 전문 직업인들의 모임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100년 전 선조들처럼 한마음 한뜻으로 한민족의 발전과 세계 평화·인류 공영을 위해 힘써주기를 당부한다. 조국의 국민들도 해외 동포들의 헌신을 잊지 말고 후손들을 보듬어야 한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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