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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도 인과관계도 '관객 자유'…장강명 원작 연극 '그믐'

송고시간2019-10-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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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 섞인 책' 같은 연극…기존 연극 패턴 뒤엎는 신선미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중 한 장면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중 한 장면

[서울문화재단 제공]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책을 읽기 전에 제본된 부분을 잘라내. 그다음에 그걸 마구 섞어. 그러고 나서 책을 읽는 거지."

장강명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에서 '소년'이 하는 대사다.

지난해 초연에 이어 지난 9일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에서 재연을 시작한 '그믐'을 보는 관객은 소년의 대사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 어떤 사건이 과거이고 미래인지, 사건의 인과관계는 무엇인지, 심지어 그 사건이 실제인지 그저 기억인지도 모호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믐'은 학창 시절 친구를 죽인 소년이 15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남자'가 돼 바깥세상에 나오는 이야기를 담는다. 옛 여자친구가 일하는 출판사에 '우주알 이야기'라는 소설을 써 보내고, '여자'는 그 소설이 자기 얘기인 것을 알고 남자를 만난다. 재회한 연인은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남자가 살해한 친구 '영훈'의 어머니가 그들 주위를 계속해서 맴돌면서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그믐'은 등장인물들의 상처와 기억, 속죄를 다룬다. 친구를 죽였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 어릴 적 어머니가 자기를 죽이려 한 것 같다며 괴로워하는 여자, 아들을 죽인 남자를 쫓아다니며 죄책감을 유발하는 영훈의 어머니까지. 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건 각자의 기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를 볼 줄 아는 남자는 다른 이들을 어루만지며 속죄하고, 자신의 미래를 알면서도 비극을 받아들인다.

줄거리만 본다면 언뜻 평범한 서사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믐'은 시간 순서대로의 스토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현재의 사건을 보여주다가도 다시 과거의 사건을 보여주고, 또 먼 미래의 사건을 보여준다. 극에서 몸에 우주알이 들어온 후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볼 수 있게 된 주인공 남자처럼 말이다. 예컨대 소년의 학창 시절 체벌을 하는 선생님을 보여주다가 남자가 영훈의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갑자기 수감복을 입은 영훈의 어머니가 남편과 면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식이다.

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중 한 장면
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중 한 장면

[서울문화재단 제공]

따라서 관객은 일련의 사건들이 어떠한 인과를 가졌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관객은 120분간의 연극이 끝이 나도 개운치 않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극이 전개되는 '패턴'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그믐'의 관객은 무대에서 본 장면 장면을 자유롭게 짜 맞춰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은 시작과 끝이 있는 '선'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무대에는 달 모양을 닮은 큰 원과 작은 원을 45도 각도로 기울여 설치했다. 이 두 개의 원 위를 배우들이 뱅뱅 돌며 연기한다. 극단 '동' 특유의 '신체행동연기'를 보여준다. 신체행동연기란 행동의 나열을 통해 인물과 장면을 전달하는 것이다. 배우들은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관객에게 몸짓의 의미와 감정 등을 마음껏 분석하도록 한다.

원작자 장강명은 '객석' 10월호에서 자신의 소설 '그믐'을 두고 "안개에 싸인 산(山)"이라고 비유했다. 연극 '그믐' 역시 그의 비유와 비슷하다. 산의 모양이 반드시 또렷하게 보여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믐'은 스토리와 시간, 즉 극 중에서 남자가 끊임없이 말하는 '패턴'이 없다. '그믐'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지난해 9월 초연된 이 작품은 제55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 등을 받으며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오는 27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볼 수 있다.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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