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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김좌진 90주기와 청산리대첩 100주년

송고시간2020-01-20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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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 영정. [연합뉴스 자료사진]

김좌진 장군 영정.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신민부 수령으로 남북만주에서 여러 활동을 하던 백야 김좌진 씨가 1월 24일 오후 2시에 중동선 산시역 부근 산중에서 김일성(金一星)이란 자에게 총살되었다는 풍설이 있다 함은 기보(旣報)한 바거니와 금 12일에 이르러 시내 각처에 씨의 서거가 확실한 것을 증명하는 부고가 배달되었다. 부고의 내용에 씨가 서거한 원인에 대하여는 일언반구가 없으므로 일시 일본 신문이 선전한 것과 같이 과연 그 반대파의 손에 사살이 되었는지 혹은 그 이외에 무슨 복잡한 관계로 해를 입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판명되지 아니하였으나 씨가 전후 20년 동안이나 남북만주로 돌아다니며 혹은 ○○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다수한 조선 청년을 모아 실제 훈련을 하고 혹은 이천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북간도 방면에 넘나들며 혹은 신민부를 조직하여 십년을 하루같이 활동하여 오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거니와 만부부당지용(萬夫不當之勇)과 발산(拔山)의 힘을 가지고 때때 조선 사람에게 '조선이 가진 만주의 장사'라는 느낌을 주던 씨도 42세의 파란 많은 역사를 이 세상에 남기고 눈 쌓인 만주 벌판에 최후의 피를 흘리고 말았다"

김좌진 장군 피살 소식이 담긴 동아일보 1920년 2월 13일자 2면.

김좌진 장군 피살 소식이 담긴 동아일보 1920년 2월 13일자 2면.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는 '흉보를 확전(確傳)하는 백야 김좌진 부음-북만(北滿)○○운동자의 거두 42세를 일기로'란 제목의 2면 머리기사로 그의 피살 소식을 뒤늦게 알렸다. 일제의 검열 때문에 '독립군'과 '독립운동'을 각각 '○○군'과 '○○운동'이라고 쓴 것이 눈에 띈다. 같은 면에 "광복단 조직 신민부 통솔 해외 풍상은 십년이 넘었다-파란중첩한 그 일생', '동지 등 발기로 장의주비회(葬儀籌備會) 사회장 거행을 결의', '칠십 노모와 슬하엔 유자(幼子)뿐', '괴력과 대음대식(大飮大食) 구척장신의 거인', '흉보 듣고 악연실색-양자 김문한 씨 "평소 성격은 매우 원만했다"' 등의 관련 기사도 실었다.

김좌진은 독립군 무장투쟁사 가운데 가장 큰 승리인 청산리대첩의 영웅이다. 동아일보 기사가 전하는 대로 10년 넘게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운동 조직을 이끌다가 1930년 1월 24일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린(海林)시 산시(山市)역 근처 한족총연합회가 운영하던 정미소에서 조선공산당원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일본군을 벌벌 떨게 만든 독립군 대장으로서는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올해는 청산리대첩 100주년이고 24일은 그의 90주기를 맞는 날이다.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김좌진 장군 생가터에 세워진 김 장군 동상. [홍성군 제공]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김좌진 장군 생가터에 세워진 김 장군 동상. [홍성군 제공]

김좌진은 1889년 12월 16일 충남 홍성의 안동 김씨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한 김상용이 11대조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3세 때 형 김경진이 15촌 아저씨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가장의 책임을 떠맡았다. 15세 때는 집에서 부리던 노비 50명을 모아놓고 종 문서를 불사른 뒤 논밭을 나눠주었다. 1905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했다. 가산을 정리한 돈으로 고향에 호명학교를 세워 운영하다가 1907년 다시 상경해 구국운동에 나섰다.

1910년 한일 강제합병이 단행되자 김좌진은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가 1911년 일제 경찰에 체포돼 2년간 옥살이를 했다. 1913년 9월 출옥 후 홍성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또다시 10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1915년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 뒤 1917년 만주로 건너갔다.

해군은 1천800t급 네 번째 잠수함을 김좌진함으로 명명했다. 2013년 8월 13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열린 진수식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해군 관계자 등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해군은 1천800t급 네 번째 잠수함을 김좌진함으로 명명했다. 2013년 8월 13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열린 진수식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해군 관계자 등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만주에서는 기미독립선언에 앞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하고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정의단 군사책임자가 됐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꿨다. 북로군정서는 독판에 서일, 사령관에 김좌진을 각각 선임하고 이듬해 2월 독립군 간부를 길러내기 위한 사관연성소를 설치했다.

청산리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이 1920년 10월 21일부터 엿새간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 일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일본군 전사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해 1천257명이고 부상자는 200여 명으로 기록돼 있다.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에 그쳤다.

중국 지린성 허룽시에 있는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독립기념관 제공]

중국 지린성 허룽시에 있는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독립기념관 제공]

그러나 만주의 한인에게는 큰 시련이 닥쳤다. 일제가 무자비한 보복에 나서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른바 경신참변이다. 그해 10월과 11월 일본군이 살해한 만주 한인은 3천693명에 달했고 불에 탄 민가가 3천288채나 됐다. 학교 41개교와 교회 16곳도 파괴됐다.

김좌진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부대를 이끌고 중소 국경 부근인 밀산(密山)으로 이동했다가 홍범도·조성환과 함께 10여 개의 독립군 부대를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의 부총재로 취임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6월 소련 스보보드니에서 주도권 다툼 끝에 무력 충돌을 빚어 수백 명이 숨지는 자유시참변을 겪었다. 김좌진은 스보보드니로 가다가 만주로 돌아와 화를 면했지만 독립군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2013년 7월 새누리당 홍일표(왼쪽), 권성동 의원이 중국 헤이룽장성 하이린시 김좌진 장군 순국지에서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3년 7월 새누리당 홍일표(왼쪽), 권성동 의원이 중국 헤이룽장성 하이린시 김좌진 장군 순국지에서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김좌진은 1925년 3월 김혁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고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을 맡았다. 성동사관학교도 세워 무관을 양성했다. 1929년 7월 신민부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제휴해 한족총연합회가 결성되자 위원장에 추대됐고 이듬해 1월 순국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 내가 죽어야 하다니…그게 한스러워서…"였다.

김좌진의 암살 동기는 지금까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와 한족총연합회에서 활동한 이강훈 전 광복회장은 "일본 형사의 회유로 변절한 김봉환(일명 김일성)이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이며 재중청년동맹원인 박상실을 사주해 암살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신용하 교수는 "김좌진이 공산 조직의 침투를 막으려 하자 공산단체 적기단이 비밀단원 박상실을 시켜 암살한 뒤 '김좌진이 친일파로 변절해 처단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가 중국 목단강한국인회와 함께 21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이린시 한중우의공원에서 개최하는 김좌진 90주기 추모행사 포스터.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제공]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가 중국 목단강한국인회와 함께 21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이린시 한중우의공원에서 개최하는 김좌진 90주기 추모행사 포스터.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제공]

충남 홍성군은 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맞아 올해를 '백야 김좌진 장군 나라 사랑 선양의 해'로 선포하고 '설날장사 씨름대회'와 'KBS 열린 음악회' 개최, 연극과 다큐멘터리 제작, 생가 주변 개발 등 다채로운 기념사업을 펼치기로 했다.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는 중국 목단강한국인회 주관으로 21일 순국지인 헤이룽장성 하이린시 한중우의공원에서 90주기 추모 행사를 연다. 김좌진 순국 90주기와 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맞아 그의 애국정신이 새롭게 부각되고 당시 독립군들의 헌신과 재중동포들의 희생도 재조명되기를 기대한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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