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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박사가 풀어본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 암호

송고시간2020-02-1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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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이야기' 시리즈 첫권 '너 어디에서 왔니'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아라비아에는 아라비아의 밤이 있고 아라비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하루 밤 동안 왕을 위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입니다. 한국에는 한국의 밤이 있고 밤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꼬부랑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머리말을 풀어내며 이야기 속으로 안내한다. 이 대목에서 절로 떠오르는 게 동요 '꼬부랑 할머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꼬부랑/ 넘어가고 있네//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고개는 열두 고개 고개를/ 고개를 넘어간다"

천하루 밤을 지새우면 아라비아의 밤과 그 많던 이야기는 결국 끝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꼬부랑 할머니의 열두 고개는 끝이 없다. "세상이 골백번 변해도 한국인에게 꼬부랑 고개, 아리랑 고개 같은 이야기의 피가 가슴속에 흐르는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임신 4개월째의 태아 형상(사진=파람북 제공)

임신 4개월째의 태아 형상(사진=파람북 제공)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어령 박사가 삶의 대미를 장식할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 첫 권인 '너 어디에서 왔니'는 10여 년 동안의 산고를 거쳐 출간에 이르게 됐다. 희수(喜壽)인 77세에 잉태해 미수(米壽)인 88세에 '출산'했으니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늦둥이라고 하겠다.

이 박사는 첫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시작으로 지난 60년 동안 무려 100여 권의 저서를 펴내 왔다. 반평생 동안 이화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일간신문의 논설위원과 월간지의 주간을 역임했으며, 초대 문화부 장관,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 이야기'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무리한 집필로 머리 수술을 받았고, 암 선고를 받아 다시 두 차례의 큰 수술이 있었다. 혹독한 산고 끝에 시리즈의 '탄생'편인 '너 어디에서 왔니'가 드디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생과 죽음이 등을 마주 댄 부조리한 삶. 이것이 내 평생의 화두였으며,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죽음 아닌 탄생의 이야기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들려준다.

비평가, 학자, 언론인, 소설가, 시인, 행정가, 문화 기획자 등 다채롭고 화려한 이력의 보유자인 이 박사는 직함과 수사를 모두 뒤로하고 단순한 '이야기꾼'으로 남고자 한다. 천년만년 이어온 생명줄처럼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비밀을 담고 있다고 봐서다.

저자는 21세기의 패관(稗官)을 자처한다. 술청과 저잣거리, 사랑방을 드나들며 이야기 꾸러미를 기록으로 챙겨온 조선시대의 패관처럼 온갖 텍스트와 인터넷에 떠도는 집단 지성을 채록하고 재구성해 '한국인 이야기'로 풀어낸다.

그 첫 편인 이번 책은 '꼬부랑 할머니' 동요처럼 열두 고개를 차례로 넘어가게 한다. '태명 고개'를 시작으로 '배내 고개', '출산 고개', '삼신 고개', '기저귀 고개', '어부바 고개', '옹알이 고개', '돌잡이 고개', '세 살 고개', '나들이 고개', '호미 고개', '이야기 고개' 등을 사부작사부작 걸어볼 수 있다.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모습을 그린 채용신의 초상화 작품 '운낭자상(雲娘子像)'(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모습을 그린 채용신의 초상화 작품 '운낭자상(雲娘子像)'(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삶의 끝자락에 선 저자가 '탄생'을 이야기한다는 게 다소 의외다 싶다. 하지만 저자는 생명이란 그 자체로 소중한 선물이라면서 "죽음을 알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계속 거슬러 가면 36억 년 전 진핵 세포가 생겼던 순간까지 간다"고 말한다.

서양인들은 아이의 나이를 셀 때 엄마 배 속에 있는 시간은 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문화와 문명이 아이를 키운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한국인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한 살이 된다. 태아는 자신이 알아서 태반을 만들고, 호르몬을 분비하고, 필터로 걸러내고, 뱃속에서 나갈 때를 결정한다.

주체적 존재인 이 태아에게는 태생기의 거대한 생명 질서, 우리가 모르는 대우주의 생명 질서가 있다. 태중의 아이를 한 살로 보는 게 중요한 이유다. 이는 자연과 단절된 문화·문명으로 사느냐, 아니면 대우주의 생명 질서를 바탕으로 오늘의 문명과 연결하며 사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 사람은 그것을 연결하며 살아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는 아기를 안고 자며, 포대기로 업고 다닌다. 최대한 엄마와 밀착함으로써 엄마 뱃속의 환경과 일체가 되려 하는 것이다. 산모가 미역국을 먹는 나라도 한국뿐인데, 이는 태중의 양수가 바다와 성분상 비슷해서란다.

반면, 서양에서는 아기를 낳자마자 엄마와 분리해 요람에서 재운다. 엄마 뱃속, 즉 자연과의 단절이다. 포대기로 업혀 갓난이 시절을 보낸 한국인은 '분리 불안' 같은 말을 모르고 살던 민족이었으나, 지금은 서양처럼 요람에서 살게 한다. 그러다 보니 엄마와 아기에 일체감을 안겼던 포대기가 일상에서 거의 사라졌다.

저자는 "엄마와 상호작용을 하게 했던 '포대기 육아법'은 엄마 등에 업힌 아이에게 엄마 자궁으로 돌아간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 쌓이게 한다"며 "업은 엄마도 좋고 업힌 아기도 좋은 '어부바 문화'가 우리 곁에서 사라진 반면, 서양 사회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은 무척 아쉽다"고 말한다. 아기가 엄마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며 '어깨 너머로 배운다'는 말이 일상에서 없어진 배경이기도 하다.

다음은 저자가 책의 후반부 이야기 '호미 고개'에서 들려주는 꼬부랑 고갯길의 비유적 가치-.

"'직선'이란, 어떤 목적으로 향해 곧게 그려진 최선의 지름길이다. (하지만) '직선'은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해서 처음으로 이 세상에 만들어졌다. 한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꼬부랑 고갯길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신'이 만든 길이다."

이번 '너 어디에서 왔니'의 후속서는 '알파고와 함께 춤을', '젓가락의 문화 유전자', '회색의 교실' 등의 제목(가제)으로 올해 안에 잇달아 출간될 예정이다.

파람북. 432쪽. 1만9천원.

'너 어디에서 왔니'

'너 어디에서 왔니'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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