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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는 '부패·무능의 화신'인가

송고시간2020-04-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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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너 미터 옥스퍼드대 교수 '중일전쟁'에서 문제 제기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 제2차 세계대전은 보통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것으로 시작됐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유럽에서 수천 ㎞나 떨어진 아시아대륙 동쪽 끝에서는 이 세계대전의 일부가 될 전쟁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비록 처음에는 그것이 세계 차원의 전쟁과 연계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고, 심지어 전쟁으로 공식 선포되지도 않았지만, 그 전쟁의 참혹함은 인류 역사의 어떤 전쟁도 능가할 정도였다.

래너 미터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가 지은 '중일전쟁'(글항아리)은 1937년 7월 7일 중국 베이징(北京) 근처에서 벌어진 중국군과 일본군의 국지적 충돌인 '루거우차오(蘆蘆橋) 사변'으로 시작해 중국 전역은 물론 인도차이나, 버마(현재의 미얀마), 인도까지 확대됐다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종결된 8년간의 전쟁을 시대순으로 짚어가며 그 전쟁의 전개 과정과 의미를 분석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장 혹독한 피해를 겪은 나라는 소련으로 알려졌지만,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겪은 참화도 결코 그에 못지않다. 정확한 집계는 아마도 영원히 불가능하겠지만, 사망자는 최소 1천500만명, 난민은 8천만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나치 독일과 소련 간 전쟁 기간의 두 배에 이르는 세월을 전쟁의 참화에 시달리는 동안 중국인들은 난징(南京) 대학살, 곳곳에서 자행된 독가스 살포, 생화학전 연구부대에 의한 생체 실험 등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만행에 노출됐다.

종전 직전 중국의 판도
종전 직전 중국의 판도

짙은 색은 1944년 일본이 최후의 대규모 공격 '이치고 작전' 이후 차지한 지역. 옅은 색은 기존 점령 지역. [글항아리 제공·재판매 및 DB금지]

그러나 원서의 제목 'Forgotten Ally(잊힌 연합국)'가 시사하는 것처럼 이 전쟁은 잊혔다. 간난신고 끝에 마침내 승리했다는 점에서 찬양받을 만하고,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비극적으로 스러졌다는 점에서 기억되고 추모되어야 마땅할 이 전쟁이 왜 잊혔는지가 이 책의 주된 탐구 주제다.

저자는 이 전쟁이 기본적으로 '장제스(蔣介石)의 전쟁'이라는 점이 그 이유라고 본다. 중국이 동맹이라고 믿은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들은 유럽의 전쟁에는 사활을 걸었지만,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전장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 '항일 전쟁'의 또 다른 주체라고 할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은 전쟁에서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했으며 장기적으로 장제스의 국민당 군으로서는 동지라기보다는 적에 가까웠다. 궁극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겼으나 내전에서 패배해 나라를 빼앗긴 장제스는 1970년대 들어 중국이 국제무대에 본격 등장하면서 '대만 섬을 일시 점거한' 미미한 세력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여기에 장제스 국민당 대 마오쩌둥 공산당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부패와 무능의 화신'인 장제스와 국민당은 민족의 원수인 일본을 눈앞에 두고도 국내 정권 유지에 급급해 공산당을 탄압하는데 더 기력을 쏟아부었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와 반대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어떤 고난이 닥쳐도 신념을 잃지 않고 절대로 인민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숭고한 전사로 곧잘 그려진다.

'전환시대의 논리'나 '중국의 붉은 별'과 같은 책을 읽은 한국의 다수 식자층뿐만 아니라 옌안(延安)의 공산당 근거지를 방문한 미국 정부의 이른바 '딕시 사절단' 등 공산당을 피상적으로 관찰한 상당수 미국인의 관점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학자 찰머스 존슨은 마오쩌둥의 승리 비결은 옌안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해 농민들을 동원한 그의 전시 정권 역량에 있다고 주장하는 책을 써 관심과 찬사를 모았다.

그러나 이 같은 시각은 올바른 것일까. 저자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거대한 투쟁에서 중국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외부 세계는 중국이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항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혹독한 대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하기까지 중국은 사실상 홀로 세계 최첨단 군사 장비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서야 했다.

미국의 참전이 유리한 것만도 아니었다. 군사 문제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이 파견한 조지프 스틸웰 장군은 장제스에게 방해만 될 뿐이었다. 연합국들은 최대 80만명에 달했던 일본군의 발을 묶어놓는 것이 중국 전장의 최우선 목표라고 봤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이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8년간의 전쟁 기간에 중국인들이 겪은 고통은 지옥도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수많은 일화가 책에 소개되지만, 허난성 주민들이 겪은 참사는 그 가운데서도 극단적이다. 중국 문명의 발상지이고 곡창지대인 허난은 이미 1938년 일본군의 공세에 내몰린 국민당군이 최후의 수단으로 황하의 강둑을 무너뜨리는 수공작전을 편 탓에 수십만 명이 죽고 300만~500만명이 집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1943년에는 허난에 가뭄으로 인해 대기근이 닥쳤다. 전쟁의 와중인 데다 지역 할거주의로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은 인근 지역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먹을 것이 없는 주민들은 새똥을 물에 씻어 소화되지 않은 밀 알갱이를 먹었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방법을 찾아낸 사람은 행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그 상황에서도 곡식을 세금으로 바쳐야 했다. 한 가족은 마지막 곡식을 징수관에게 내주고는 온 가족이 강에 뛰어들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아내를 팔려고 장터에 내놓은 남편이 있는가 하면 마침내는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 생겨났다.

중국 난징의 '난징대학살 희생동포 기념관'
중국 난징의 '난징대학살 희생동포 기념관'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난징대학살, 충칭대폭격 등 중일전쟁 중 공산당이 장악하지 않은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은 열외로 취급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난징대학살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기념관은 사건이 발생한지 40년이 지나서야 세워졌다. [연합뉴스 자료사진·재판매 및 DB금지]

이런 극한의 시련 속에서도 장제스는 싸워야 한다고 판단이 서면 싸웠다. 만주를 침공하는 일본에 대항하지 못한 것은 국력과 군사력의 차이를 생각했을 때 도저히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지 비겁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루거우차오 사변 때 장제스는 화베이(華北) 영토 일부를 내주고 일본과 타협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일기에 "왜구가 루거우차오에서 도발했다, 이제는 반격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라고 썼다.

그 이후 장제스 자신이 '치욕'이라고 한 상하이, 난징에서의 패배와 퇴각을 비롯해 수없이 패퇴를 거듭한 끝에 남서부 빈곤한 산악지역인 충칭(重慶)으로 내몰릴 때까지 항전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가 이끄는 국민당군이 부패하고 무능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도 이를 인정하고 괴로워했으며 한때는 패전에 책임을 지고 자살하는 것도 고려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의 저항이 없었더라면, 중국이 수십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을 묶어놓지 못했더라면 세계대전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중국은 '연합국'으로서 공헌을 인정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저자는 "기나긴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이 맡았던 중요한 역할에 대한 종합적이면서 완전한 재해석을 할 때가 됐다"면서 "미국, 소련, 영국과 더불어 전시 4대 강국 중 하나였던 중국의 지위 또한 회복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세찬 국방대 교수와 함께 책을 공동 번역한 전쟁사 연구가 권성욱 씨는 역자 후기에서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장제스 정권이 민중과 괴리돼 4억 인민의 역량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군을 이길 수 없었다는 시각은 피상적"이라면서 "냉철하게 말해서 장제스 정권이 8년을 버텨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고 강조했다.

중일전쟁의 현장을 녹화한 다큐멘터리 같은 여러 에피소드 못지않게 저자의 주석보다 분량이 훨씬 더 많은 역자 주석을 읽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다. 원서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내용을 보충해 주고 저자가 맥락을 잘못 이해하거나 사실과 달리 기술한 내용까지 바로잡아 준다. 웬만한 내용이 없이는 힘든 일이다.

528쪽. 2만5천원.

장제스는 '부패·무능의 화신'인가 - 3

cwhy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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