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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탁의 탁견] 디아스포라, 또는 조난자들

송고시간2020-04-0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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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전시관 둘러보는 교육생들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전시관 둘러보는 교육생들

(서울=연합뉴스) 이우탁 기자 = 비무장지대에서 북측 심리전 방송 요원으로 복무하다 스물두살 때 휴전선을 넘어 한국에 온 주승현 박사, 그가 쓴 '조난자들'(생각의 힘.2018)이라는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주 박사는 서문에서 "한반도는 분단 체제하에서 수많은 조난자들을 양산해냈다. 조난자들은 여전히 왜곡되고 피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25분 만에 비무장지대를 건너 탈북해서 팍팍한 삶을 살면서도 공부를 해야겠다며 연세대에 입학해 통일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주 박사는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달아 이 책을 냈습니다.

'실업과 호구지책의 사이' 또는 '미생의 삶,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라는 소제목의 글들이 이어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탈북자들의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자유를 찾아 떠나는 디아스포라'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옵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서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의미가 확장돼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을 의미합니다.

현재 한국 땅에는 4만명에 이르는 탈북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모두 다양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갈려있기도 하고, 사는 지역도 다양합니다.

연합뉴스 한반도부에서는 한국에서 잘 정착해 사는 이들의 스토리를 담아 [탈북 후]라는 코너를 마련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입니다. 많은 탈북민은 방황과 번민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그동안 많은 탈북민들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고향' 북한 땅에서의 삶과 새로운 터전 남한에서의 삶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에게 '탈북'이라는 행위가 남쪽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정치적인 행위가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탈북자 출신으로 서울대에 진학해 외교학을 공부하고 있는 허준 씨는 두 번에 걸친 자신의 탈북 경험을 담담히 소개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꿈꾸는 청년 박유성 씨 등을 통해서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힘겨운 생활을 하게 된 북한 주민들의 눈물겨운 생존기와 그 속에서 생존수단으로 등장한 '장마당' 얘기들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조난자들'을 다시 꺼내 읽게 된 계기는 탈북민 출신 모 인사가 4.15 총선에 나설 후보로 공천받는 과정에서 일었던 논란 때문이었습니다. 정치적 얘기는 가급적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당당하게 사는 수만 명에 달하는 그들의 남한에서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탈북민' 또는 '탈북자'라는 용어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만난 한 분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의 고충을 털어놓으면서 '평양에서 이사해온 한국 사람'이라고 불러달라고 하더군요.

주 박사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북한에서는 배신자로, 한국에서는 북한 체제의 증언자인 동시에 이등 국민, 삼등 국민으로 취급"되며 살아가는 탈북자들의 삶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결국 탈북민은 탈출자인 동시에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생아다. 이러한 낙인 효과의 무게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국제사회의 미아로, 디아스포라로 남기 원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증언을 들으며 한동안 상념에 빠졌습니다.

우리 민족의 뜻과 상관없이 허리가 잘려 나간 지 75년. 그 세월의 단절이 주는 아픈 혼종성의 단면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주승현 박사의 책을 읽으며 오 준 전 유엔대사가 지난 2014년 12월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 인권 문제가 공식 의제로 채택된 자리에서 한 연설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주민은 그저 아무나(anybodies)가 아니다"는 오 대사의 메시지와 당시 연설 내용은 지금도 외교가에서 회자합니다. 오 대사는 "먼 훗날 되돌아볼 때, 우리와 똑같은 인권을 가진 북한 주민들을 위해 오늘 우리가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도 했습니다.

과연 탈북자들이 이 땅에서 '아무나'가 아닌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 디아스포라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는지 차분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을 이루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잠재적인 조난자의 운명을 배면(背面)에 깔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 주 박사의 독백이 귓가에 맴돕니다.

lw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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