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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로마는 어떻게 세계 패권을 차지했나

송고시간2020-04-0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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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양잉즈 '용과 독수리의 제국' 번역 출간

(서울 = 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 "광활한 영토에 웅거하여 장기적으로 번영을 유지하며 세계 대제국으로 일컬을 수 있는 나라는 역사를 통틀어 10여 개에 불과하다. 이처럼 출중하면서도 짧은 명단 가운데서 거의 동시에 나타나 맨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진·한(秦·漢) 황조와 로마제국이다. 두 제국은 전성기에 각각 지구 인구의 4분의 1을 보유했으며 안정적으로 태평성대를 이룬 시기도 200년을 넘었다. 전자는 천하를 통일했다고 자랑했고 후자는 지구의 패권을 장악했다(imperium orbis terrae)고 자랑했다."

'용과 독수리의 제국'(원제 龍與鷹的帝國·살림)은 각각 중화 문명과 서양 문명의 토대를 닦은 두 제국의 흥망성쇠를 비교해 가며 1천200년 역사를 더듬어간다. 부록과 주석을 제외하고도 771쪽(한글판 기준)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역사학이 아닌 물리학 전공자가 썼다는 점이 놀랍다. 제목의 '용과 독수리'는 물론 중국과 로마를 뜻한다. '용'은 중국에서 황제의 상징으로 쓰였고 '독수리'는 로마군단의 표지였지만 로마의 확장에 따라 로마 패권의 상징이 됐다.

진시황릉 병마용
진시황릉 병마용

[살림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저자 어우양잉즈(歐陽瑩之·Sunny Y. Auyang)는 상하이에서 초등학교, 홍콩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미국으로 건너가 MIT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여년간 MIT 교수로 재직하면서 복잡계 이론 분야를 주로 연구해 '복잡계 이론 기초', '양자역학, 무궁무진한 미래' 등 저서를 냈다. 2005년 세상을 떠난 광둥(廣東)성 출신 아버지의 뜻에 감복해 '국학', 즉 중국에 관한 학문 연구에 매진하기로 결심했고 이 책이 그 첫 번째 성과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오래 타국에 머물며 중국의 문화적 근본을 망각했다"고 탄식하며 자신은 "영원히 조국의 산하와 대지를 품겠다"면서 유해를 창장(長江) 상류에 뿌려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로마군단 사병
로마군단 사병

[살림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책은 기본적으로 시대순으로 진·한과 로마의 생성 및 발전에서 소멸의 과정을 따라가며 양쪽의 정치와 경제, 문화, 군사 등을 세밀하게 비교, 분석하는 방식으로 구성됐지만, 이 같은 집필 의도가 반영돼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왜곡된 진·한, 나아가 중국 역사와 문명의 실상을 기술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예를 들어 고대 중국, 특히 전국시대를 끝낸 진나라에서는 군사력과 억압으로 매사를 해결하려 했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저자는 군대조직, 병역기한, 전쟁빈도, 군민의 사상(死傷), 엘리트 여론 등 세세한 실례를 비교해 가며 로마의 무력 남용이 진나라보다 심했음을 밝힌다. 이는 동일한 장기전 끝에 만들어진 정부가 어떻게 로마에서는 군사독재로, 중국에서는 문치(文治) 전제로 귀결됐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물론 이만한 대제국을 장기간 유지한 것을 보면 모두 나름의 장점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두 제국의 포용을 든다. 화하(華夏)족과 로마인은 중국과 이탈리아의 주류 민족이 되어 항상 교만하고 편협한 태도로 이기적인 싸움을 좋아했지만, 미국의 인종차별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들의 편견은 1860년대 남북전쟁 전의 인식보다는 1960년대 민권운동 뒤의 상황과 더 가깝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화하족은 상이한 방언을 쓰지만 동일한 문자를 써서 '의관(衣冠)이 같은 나라'로 통합됐고 이탈리아에서도 수많은 사투리가 점차 소멸하면서 동일한 라틴어를 말하고 '같은 양식의 토가를 입는 나라'로 통합됐다.

동한 무덤 벽의 궁궐 조각
동한 무덤 벽의 궁궐 조각

[살림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변방 민족의 창조성'을 발휘한 진과 로마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더 유리했던 주변 나라들을 흡수해 통일 국가를 건설한 것도 공통점이다. 두 나라는 본래 고급 학문에 별 흥미가 없었고 공예 기술 부문에서도 장기를 발휘하지 못했다. 진나라의 쇠뇌와 철검은 낙후돼 있었고 로마의 무기도 늘 적국보다 수준이 떨어졌다. 그러나 국가조직에서는 독창적인 면모를 보이면서 효율적인 정치기관을 발전 시켜 인력과 물자 동원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변방 민족은 발명에는 뒤떨어지더라도 창조성은 뛰어날 수 있다. 진부한 사상의 굴레가 없는 이들은 새로운 사물을 받아들이면서 기민하게 시대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로마의 우월함을 인정한 분야는 공공도덕을 받들고 법률을 준수하는 측면이다. 특히 로마공화정의 기구는 오늘날 영국 헌법과 마찬가지로 많은 점에서 기성 법규를 고수하지 않고 합리적인 묵계에 따르며 경직된 매듭을 비껴갔다. 로마공화정은 결국 실패했지만, 이 부문에서 중국의 유가 사대부보다는 훨씬 뛰어났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저자는 책에서 내내 유가의 정치를 비판한다. 한나라에서 유가만을 존중한 이래 사대부가 2천년 간 집권하면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중시함에 따라 정치 관념에 줄곧 창조성이 부족했다. 가신은 반드시 '가(家)'에 충성을 바쳐야 하므로 가만 알 뿐 '국(國)'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이처럼 협소한 충성 관념은 개인 관계로 이뤄진 봉건제도에는 적합하지만, 대제국의 경영원리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살림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저자는 오히려 유자들이 극력 비판하는 법가 사상에 좋은 점수를 준다. 그는 "법에 따라 통치하려는 이들의 원칙은 현대의 헌정체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헌법 정신과 통하는 길을 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은혜가 부족해 진나라는 멸망했다"는 유자들의 주장으로 인해 배척되고 이후 유가가 독점적 지위를 누리면서 법치주의 대신 인치주의가 힘을 얻어 모든 것을 통치계층 군주와 군자의 개인 품성으로 귀결시키고 만다. 저자는 "유가는 봉건귀족의 경전 가치를 계승하고 그것을 특별히 귀하게 여기며 다른 모든 학파는 백안시한다. 이 때문에 귀족의 부양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유자들이 성인으로 받드는 맹자에 대해서도 "직책이 없었지만 도처에서 황금을 받았고 그의 뒤를 따르는 수레는 수십 대, 시종은 수백 명에 달했으며 제후국을 전전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고 비아냥댄다.

마찬가지 논리로 진시황과 한 고조에 대해서도 유가의 입김이 반영된 옛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평가와는 다른 분석을 내놓는다. 한 고조 유방은 초 패왕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후 일등 공신이었던 한신을 죽이는 등 자신을 황제로 옹립한 7명의 제후왕을 모두 제거했다. 한신이 죽어가면서 남겼다는 말이 그 유명한 '토사구팽(死狗烹)'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공신을 한 명도 억울하게 죽이지 않았지만 '어진 은혜가 부족하다'는 멍에를 쓰고 있다.

한나라가 제자백가를 퇴출한 후 유가의 가르침을 원칙으로 삼은 후 유자로만 정치 엘리트를 충원했다면 로마의 엘리트 충원 기준은 일관되게 재산의 규모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원로원 정원은 600명이었고 로마제국 기사 규모는 1천명에 달했다. 또 모든 도시에서 평균 100명의 최상위 부자가 도시 원로원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세 부류의 구성원이 대지주 사회 엘리트 계급으로 정치를 농단했다. 이와 반대로 한나라에서는 적어도 초기에는 고위 관리나 공신의 후예와 함께 농부 출신도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두 제국 모두 진취적인 정신이 쇠퇴할 때 중심이 점차 동쪽으로 이동한 점도 흥미롭다. 330년에 건설된 콘스탄티노플 인구는 약 50만명이었는데 이는 기원전 25년 한나라가 장안을 떠나 새로 도성을 마련한 동쪽의 낙양과 비슷한 규모였다. 그리고 동천 이후 두 나라는 비슷하게 몰락의 길을 걷는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537년 후 화베이(華北) 지방은 소수민족에 분할됐고 기원전 31년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제국을 정립한 지 510년이 지나 지중해 서부는 야만인들에게 분할됐다.

그러나 두 제국이 받은 타격은 심중했지만, 결코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호족과 야만인들은 중국과 로마를 파괴하면서도 생기발랄한 혈통과 풍습을 제국에 주입했다. 야만인과 소수민족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 것은 대제국 내부의 암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서로마제국은 476년 멸망했고 동진(東晉)은 316년 흉노족이 장안을 점령하면서 강남으로 쫓겨났다. 중국과 서양의 역사는 1천 년 동안 서로 만나다가 이 지점에 이르러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로마적인 요소와 뿌리는 서로마제국의 옛 땅인 이탈리아, 갈리아, 에스파냐, 아프리카에 전해졌고 로마제국의 체제는 대부분 게르만왕국에서 채택됐다. 로마인과 게르만인은 모두 천주교를 믿었고 성당에서는 로마제국의 전제 조직을 원용했다. 로마시가 상징하는 로마제국의 이미지는 오래도록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분열된 서로마제국은 다시는 통일되지 못했다. 그와 반대로 화베이 지역을 장악한 오호십육국은 결국 재통일되고 중국은 중간중간의 분열을 겪으면서도 동일한 문화와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책은 여기에서 끝나고 이 질문에 관해 저자는 답하지 않는다. 중국 원로 역사학자 쉬줘원(徐倬雲)이 추천사에 밝힌 대로 '어째서 이 두 대륙의 제국이 이렇게 발전하다가 나중에 또 어째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까'라는 점을 다뤘으면 좋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 문제가 '아버지의 뜻에 감복해 국학 연구에 매진하기로 결심한' 저자의 다음 연구 주제일지도 모른다.

김영문 옮김. 920쪽. 4만5천원.

중국과 로마는 어떻게 세계 패권을 차지했나 - 5

cwhy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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