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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8인이 집대성한 조작간첩의 역사

송고시간2020-08-1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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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 교수 등, 공저 '간첩 시대'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건전지를 다량으로 사는 사람, 구두창이 물에 젖는 것을 피하는 사람, 동네 사람에게 이유 없이 친절하게 행동하는 사람, 달러를 소지하고 일정한 직업 없이 돈을 많이 쓰는 사람, 주소가 없거나 수시로 여행과 이사를 하는 사람…."

1966년 11월 대한뉴스 '이것이 간첩이다'에 나왔던 '간첩 식별 요령'이다. 지금 돌아보면 얼토당토않다고 실소할 수 있지만, 이는 엄존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잡혀가 곤욕을 치른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위의 식별요령이 함의하고 상징하는 바는 명백하다. 누구든 의심스러우면 가차 없이 신고하라는 거다. 수상한 사람이면 언제든 잡혀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로도 읽힌다. 국가라는 이름을 내세워 이렇게 간첩으로 몰아갔던 이들은 누구였을까? 그 진실은 또 무엇이었을까?

1970년대 반공방첩 표어 [책과함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970년대 반공방첩 표어 [책과함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974년 4월 서울 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울릉도 간첩단 사건 첫 공판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4년 4월 서울 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울릉도 간첩단 사건 첫 공판 [연합뉴스 자료사진]

김정인 춘천교육대 교수 등 8명의 학자는 재단법인 들꽃과 함께 '간첩 시대'를 공동 집필해 간첩 조작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뤘다. 재단법인 들꽃은 조작간첩사건 피해자들이 받은 보상금을 종잣돈으로 설립됐다.

이 책은 현대사에 등장한 여러 유형의 간첩사를 개괄적으로 다루고, 조작간첩사건의 기획·실행을 주도한 공안기구의 변천 과정, 간첩 담론의 역사적 변화, 조작간첩사건과 배경 등을 망라해 돌아본다. 저자들은 이를 통해 '공안과 간첩'이 분단과 독재체제에서 일어난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비극을 드러낸 키워드였다고 역설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남과 북은 냉혹한 분단 현실에서 상호 정신없이 공작원을 침투시켰다. 간첩 수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줄어들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공안기구들은 평범한 시민들을 간첩으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2007년 대법원은 1972년부터 1987년까지의 불법구금과 고문 의혹 등으로 다시 재판해야 하는 사유가 있는 224건을 추출했는데, 이 가운데 간첩 조작 의혹 사건이 141건으로 63%에 달했다.

평범한 시민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들은 '외부의 적'인 간첩은 국가 입장에서 위기 요인이지만 동시에 기회였다고 말한다. 간첩은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이자 남한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했고, 권력은 이런 필요에 따라 평범한 시민들을 간첩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간첩으로 조작된 이들은 서울대 교수부터 어부까지 다양했다. 책은 조작 피해자의 유형을 크게 월북자 가족, 재일 한인, 재유럽·미국 한인, 납북 귀환 어부로 나눈 뒤 각 유형에 해당하는 개별 사건과 그 실체를 들여다본다.

그 대표 사례가 1974년의 '울릉도 간첩단' 조작 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십여 년 이래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1968년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보다 더 큰" 사건으로 발표했다. 이들 피해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됐고, 허위자백을 받는 과정에서 수사관들에게 무차별 구타와 물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일부는 사형 선고를 받아 1977년에 사형이 집행된다.

조작된 간첩 사건의 발표는 정치적 판단에 의해 이뤄지기 마련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간첩 사건이 줄줄이 일어났고, 독재정권이 위기에 처하고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뜨거울 때면 간첩 사건이 발표됐다.

박정희 정부는 삼선개헌 정국에서 1967년 동백림사건을 터뜨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등을 간첩으로 만드는 무리수를 뒀고, 이듬해에는 통혁당 사건을, 1971년에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일동포 형제 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당시 대학에서는 교련 반대 시위가 한창이었고,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예비군 폐지를 주장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전두환 정부에서도 재일동포, 납북어부, 유학생들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악습이 반복됐다.

"간첩 조작이 공안기관들의 실적 경쟁의 산물이기도 했다"는 저자들은 "비극적 조작간첩의 역사가 독재권력이 무너지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에도 지속됐다"고 안타까워한다. 2003년, 재독학자 송두율은 36년 만에 귀국하자마자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으로 불리며 공안기구의 희생물이 됐고, 2010년 6·2 지방선거 때는 '황장엽 암살조 남파공작원 사건' 등이, 2013년에는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탈북자)의 간첩 조작 사건이 터졌다.

이번 책은 한국 사회에서 간첩이 갖는 의미와 간첩 담론의 변천, 공안기구의 실태, 남파공작원 등을 1장부터 4장까지 살핀 뒤 월북자 가족, 재일한인, 재유럽·미국 한인, 납북귀환어부 등이 어떻게 간첩으로 만들어졌는지 그 구체적 사례를 5장에서 8장까지 들여다본다.

재단법인 들꽃은 후속서인 '삼척 간첩단 조작 사건', '울릉도 간첩단 조작 사건'도 조만간 펴낼 예정이다.

김정인·황병주·조수룡·정무용·홍정완·홍종욱·유상수·이정은 지음. 책과함께 펴냄. 368쪽. 2만원.

역사학자 8인이 집대성한 조작간첩의 역사 - 3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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