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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한·러수교 30년·교류 160년…향후 관계는?

송고시간2020-08-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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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중 외무장관(오른쪽)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1990년 9월 30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 안보리 의장실에서 한·소 수교 협정에 서명한 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최호중 외무장관(오른쪽)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1990년 9월 30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 안보리 의장실에서 한·소 수교 협정에 서명한 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990년 9월 30일 낮 12시(한국시간 10월 1일 오전 1시)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실에서 최호중 한국 외무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발효 시점을 놓고 한·소 양국은 '즉시'와 '1991년 1월 1일'을 각각 주장해 이견을 보였으나 소련 측이 한국 측의 강력한 요구를 받아들였다.

동서 냉전의 여파로 두 나라는 적대국으로 지내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교류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그해 7월 7일 북방정책을 천명한 노태우 대통령은 다음 달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을 비밀리에 파견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협력을 제안하는 친서를 전달했다. 1985년 취임 이후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추진하던 고르바초프도 올림픽 개막 전날인 9월 16일 연설에서 긍정적으로 화답했다.

노태우 대통령(오른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1991년 4월 20일 제주 힐튼호텔에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노태우 대통령(오른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1991년 4월 20일 제주 힐튼호텔에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89년 4월 3일 서울에 소련상공회의소가 개설되고 열흘 뒤 모스크바에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무역관이 문을 연 데 이어 1990년 2월 22일과 3월 19일 소련과 한국에 각각 영사처가 개설됐다.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노태우 대통령과 그해 3월 대통령에 취임한 고르바초프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은 8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한·소 정부대표단 회담에서 유리 마슬류코프 부총리와 만나 수교 절차와 방식 등을 합의했다. 관건으로 떠올랐던 경제협력 자금은 12월 중순 모스크바에서 열린 2차 정상회담에서 30억 달러 규모로 의견 접근을 이뤘고, 이듬해 1월 한·소 경제협정에서 최종 타결됐다. 두 나라 간의 합의 사항들은 이듬해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가 승계했다.

1991년 1월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오른쪽)과 소련의 유리 마슬류코프 부총리가 한·소 경제협정을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91년 1월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오른쪽)과 소련의 유리 마슬류코프 부총리가 한·소 경제협정을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1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는 1860년 청나라와 베이징(北京)조약을 맺어 연해주를 확보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게 됐다. 1864년에는 함경도 농민 14가구 65명이 연해주 지신허(地新墟·치진헤)에 정착해 고려인의 역사가 시작됐다. 두 나라의 공식적인 교류가 이뤄진 것은 1884년 조로(朝露)수호통상조약 이후의 일이다.

19세기 후반 열강은 한반도를 놓고 각축을 벌였다. 조선 조정도 친청파·친미파·친일파·친러파 등으로 갈라져 격론을 펼쳤다. 이때 맹활약한 인물이 초대 주한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다. 일찍이 청나라에 유학한 그는 톈진(天津)영사로 재직하던 중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전권대사로 조로조약에 서명했다.

초대 주한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출처 네이버. 재판매 및 DB 금지]

초대 주한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출처 네이버. 재판매 및 DB 금지]

1885년 서울(한양)에 부임한 베베르는 해박한 동양문화 지식과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고종 내외의 신임을 얻었고 서울 외교가에서도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추천으로 경복궁 조리사로 일하다가 호텔을 경영한 처형(베베르 동생의 처형이었다는 설도 있음) 앙투아네트 손탁도 커피와 서양요리 솜씨 등으로 그를 도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 세력을 확대하자 1885년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견제하는가 하면(삼국간섭),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을 경복궁에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 했다가 실패하자(춘생문사건),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고종을 옮기는 데 성공했다(아관파천).

고종(앞줄 왼쪽)과 왕세자(가운데·훗날 순종)가 베베르 공사와 함께 러시아공사관 앞에서 찍은 사진. 고종 부자는 명성황후 국상 기간이어서 상복을 입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고종(앞줄 왼쪽)과 왕세자(가운데·훗날 순종)가 베베르 공사와 함께 러시아공사관 앞에서 찍은 사진. 고종 부자는 명성황후 국상 기간이어서 상복을 입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공사관 직원은 모두 철수했고, 일본의 압력을 받은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맺은 조약을 폐기한다고 선언했다. 1906년 2월 러시아는 서울에 공관을 다시 개설했으나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돼 영사만 파견했다. 광복 후에도 서울에 소련영사관이 문을 열었다가 1949년 폐쇄됐다.

이 모든 과정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 중구 정동 경향신문 뒤편의 옛 러시아공사관이다. 지하 2층과 지상 2층에 전망탑을 갖춘 르네상스식 건물로 1890년 8월 30일 완공돼 올해로 130주년을 맞는다. 경복궁 관문각, 독립문, 덕수궁 정관헌과 중명전, 제물포구락부 건물, 손탁호텔 등을 님긴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했다.

130년 전 건립 당시의 주한 러시아공사관 모습. [서울 중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30년 전 건립 당시의 주한 러시아공사관 모습. [서울 중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러시아공사관은 비교적 높은 지대에 지어진 데다가 전망탑이 우뚝해 당시 서울의 랜드마크로 꼽혔다. 파리 개선문을 닮은 아치 형태의 정문도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전망탑만 덩그러니 남고 대부분 파괴됐다. 정부는 고종이 1년간 기거했던 역사적 의미와 건축적 가치 등을 인정해 1977년 9월 사적 제253호로 지정하고 1987년 주변을 정비해 공원으로 꾸몄다.

소련은 수교 협상 때부터 1885년 베베르가 조선 왕실과 맺은 매입 계약을 근거로 러시아공사관 대지 반환을 요청했으나 한국 정부는 "민법 규정에 따라 국유화했을 뿐 아니라 일부는 민간에 분양해 불가능하다"며 거부했다. 주한 소련대사관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문을 열었다가 용산구 한남동으로 옮긴 뒤 러시아대사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오늘날의 옛 러시아 공사관 모습. 전망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오늘날의 옛 러시아 공사관 모습. 전망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정부가 대신 제공한 대사관 대지는 인근 배재고 운동장 자리였다. 러시아대사관은 1999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완공됐다. 8천㎡(약 2천400평)의 대지에 6층짜리 본관과 12층 부속건물 등 4개 동이 들어서 있다. 내부 자재를 모두 본국에서 공수해왔고 마감공사는 러시아 기술자들이 직접 시공했다.

러시아대사관은 '정동 크렘린'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철통 보안'을 자랑한다. 밖에서 던진 수류탄 피해를 막고자 정문부터 본관 입구까지 진입로를 철제통로로 만드는가 하면, 모든 창문을 방탄유리로 시공하고, 도청 방지 장치와 감시 카메라도 곳곳에 설치했다. 모든 직원과 가족이 영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숙소, 초·중등학교, 병원도 갖추고 있다.

2002년 7월 27일 개관한 서울 정동의 주한 러시아대사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2년 7월 27일 개관한 서울 정동의 주한 러시아대사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160년의 한·러 교류 역사 속에서 수교 30주년을 맞았고, 영욕의 근현대사를 지켜본 옛 러시아공사관 전망탑도 130살이 됐다. 1세기 전 우리는 스스로 힘을 기르지 못한 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망국의 비운을 맞았으나 이제는 달라졌다. 열강의 눈치를 보기보다 주체적으로 열강을 활용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속에서 러시아의 역할과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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