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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주기 맞는 '미국 시민권자 1호' 서재필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송고시간2021-01-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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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서재필
어린 시절의 서재필

'은자의 나라, 한국'의 저자 그리피스가 소장해온 어린 시절의 서재필 모습. 사진 위에 색을 칠했다. [양상현 순천향대 교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우리나라 공식 이민의 효시는 사탕수수 농장 취업 희망자 102명이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삼은 미주 이민 100주년에 건립이 추진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이민선의 출발지인 인천시(월미도)에 2008년 개관했다. 미국 연방의회가 2005년 12월 제정한 '미주 한인의 날'(The Korean American Day)도 이민선 도착일을 기념한 것이다.

2019년 뉴욕 맨해튼에 문을 연 한인이민사박물관은 미주 한인 이민사의 시작을 미국 시민권자가 처음 탄생한 1890년 6월 12일로 본다. 주인공은 서재필, 미국 이름으로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다. 1월 5일은 그가 숨진 지 70주기를 맞는 날이고, 7일은 탄생 157주년 기념일이다.

서재필기념공원 전경
서재필기념공원 전경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꾸며진 서재필기념공원. 기념관, 사당, 독립문, 동상, 조각공원, 야외공연장 등이 들어섰다. 기념관에는 유물 7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서광효의 둘째아들로 전남 보성 외가에서 태어났다. 충남 논산의 친가에서 성장하다가 재종숙 서광하에게 입양됐다. 7살 때 서울로 올라와 외삼촌 김성근 집에서 한학을 배운 뒤 1882년 과거(별시문과 병과)에 최연소로 급제했다. 그 무렵 외삼촌 집에 드나들던 당숙 서광범을 비롯해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개화사상에 눈떴다.

임오군란으로 신식 군대의 필요성을 느낀 김옥균은 기골이 장대한 서재필에게 일본 도야마(戶山)육군학교에 유학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1년간 수학한 뒤 1884년 7월 귀국해 고종에게 사관학교 설립을 주청했다. 그해 12월 급진 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서재필은 일본에서 함께 공부한 조선인 생도와 조선에서 그가 조련한 사관들을 이끌고 행동대장으로 참여했다.

갑신정변 거사 장소였던 우정총국
갑신정변 거사 장소였던 우정총국

사적 213호인 서울 종로구 견지동의 우정총국. 급진 개화파는 1884년 10월 12일 이곳에서 열린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이용해 정변을 일으켰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 공으로 불과 20살의 나이에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청나라가 개입해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고 주역들은 역적이 됐다. 서재필은 김옥균 등과 일본으로 망명했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생부와 아내는 자살하고 아들은 돌봐주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생모는 노비가 됐으며 형제들도 처형되거나 옥에 갇혔다.

조선이 일본에 쿠데타 주역들의 인도를 요구하자 서재필은 서광범·박영효와 함께 미국행 배를 타고 1885년 6월 1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잡일과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밤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러던 중 교회 신자의 소개로 만난 독지가 존 홀렌백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의 해리힐맨고교에 다녔다.

서재필의 의과대 졸업 사진
서재필의 의과대 졸업 사진

컬럼비아안대(현 조지워싱턴대) 의과대 졸업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맨 윗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서재필이다. [독립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는 육군 군의총감부 도서관 번역 담당 사서로 근무하다가 1889년 컬럼비안대(조지워싱턴대) 부설 코크란대에 입학했다. 이듬해 컬럼비안대 의과대로 옮겨 1892년 졸업했다. 인턴을 거쳐 이듬해 의사 면허를 얻고 워싱턴에 개인 병원을 개업했다. 1894년 6월에는 미국 철도우편국 창설자인 조지 암스트롱의 딸 뮤리얼 암스트롱과 재혼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 영향력이 높아지고 갑오경장이 단행되자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사면·복권됐다. 서재필은 1895년 12월 귀국해 중추원 고문을 맡았다. 1896년 4월 7일엔 고종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 서구 민권 사상 전파와 독립의식 고취에 나섰다. 독립문 건립과 만민공동회 개최 등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일본·러시아의 견제와 수구파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1898년 5월 두 번째로 한국을 떠났다.

미국에서 펼쳐진 3·1운동 만세 시위
미국에서 펼쳐진 3·1운동 만세 시위

1919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 참가자들이 시가행진을 펼치고 있다. [국가보훈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종군했다. 그해 말 종전 후 개인 병원을 다시 여는 한편 1905년 문방구 판매 사업에 뛰어들어 1914년 필립제이슨상사를 설립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쓰기도 했으나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독립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해 생업에만 매달렸다.

1919년 모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을 향한 열망이 다시 타올랐다. 이승만·정한경 등과 함께 4월 14일부터 3일간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열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친한파 미국인을 규합해 한국친우회를 만들었으며, 영문 월간지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창간해 일제의 만행과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와 1925년 호놀룰루 범태평양회의에도 참석했다.

김대중이 서재필에게 보낸 대통령 출마 요청서
김대중이 서재필에게 보낸 대통령 출마 요청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대이던 1948년 서재필에게 대통령 출마를 요청한 편지. [독립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947년 7월 서재필은 83세의 나이에 존 하지 미군정 사령관의 최고고문 자격으로 다시 귀환했다. 그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파쟁에 휘말리기 싫다며 입후보를 거절했다. 정부 수립 후 1948년 9월 미 군용선을 타고 세 번째로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서재필은 1951년 1월 5일 펜실베이니아주 노리스타운의 몽고메리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유해는 필라델피아 공동묘지 납골당에 안치됐으나 1994년 4월 봉환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1990년 서울 독립문 옆에 동상이 세워졌고,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과 만년을 보낸 필라델피아에 각각 서재필기념관이 들어섰다. 2008년에는 워싱턴DC에는 한인 최초로 동상이 건립됐다.

모국에 안장되는 서재필 유해
모국에 안장되는 서재필 유해

1994년 4월 8일 미국에서 봉환된 서재필의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94년 유해 봉환을 전후해 역사학계에서는 서재필을 두고 격론이 일었다. 당시에도 공적을 인정하는 시각이 여전했으나 지나친 예우라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1890년 이후로는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했다는 것이 부정적 평가의 요지다. 고국에 돌아와서도 한국어를 쓰지 않고 영어만 썼다거나 고종에게 절하지 않고 부모 산소도 찾지 않았다는 등의 비판도 제기됐다. 최근에는 서재필이 일제의 밀정 역할을 했다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서재필의 서훈 등급을 비롯한 역사적 평가를 두고 얼마든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이를 끝까지 고수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더구나 그는 역적으로 몰려 가족이 몰살당한 처지 아닌가.

서재필 유품
서재필 유품

서재필이 쓰던 외투, 모자, 권총, 회중시계, 안경 등이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재필은 개화파 선각자이자 독립유공자면서도 미국 공무원 1호를 비롯해 시민권, 의사 면허, 병원 개업, 미국인과의 결혼 등 한인 최초의 기록을 숱하게 세운 '아메리칸드림'의 선구자이자 재미동포의 비조(鼻祖)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재외동포정책 기조는 재외동포재단법 제1조가 명시한 대로 "재외동포들이 민족적 유대감을 유지하면서 거주국에서 그 사회의 모범적인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서재필이 미국 사회의 모범적인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것을 도와주는 게 모국의 역할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조금은 누그러질 수 있지 않을까.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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