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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파출소장 딸을 죽이지 않았다"…'7번방 선물' 주인공 별세(종합)

송고시간2021-03-3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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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억울한 옥살이 재심 끝에 36년 만에 무죄…재판부도 머리 숙여

소멸시효 10일 지나 소송 제기 이유로 국가 상대 손해배상 못 받아

(춘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억울함 때문에 죽어서도 구천을 떠돌 것 같아 모질게 생명을 이어왔는데…이제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억울한 옥살이 정원섭씨
억울한 옥살이 정원섭씨

[촬영 이재현]

1972년 춘천 파출소장 딸(당시 9세) 강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15년간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 정원섭씨가 2008년 재심에서 무죄 선고 직후 춘천지법 법정을 나오면서 한 말이다.

류승룡 배우 주연의 영화 '7번방의 선물' 실제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정씨가 지난 28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억울함 때문에 구천을 떠돌 것 같아 모질게 생명을 이어왔다는 정씨는 30일 모든 장례 절차를 끝으로 비로소 완전한 자유인이 됐다.

'통한의 36년 세월'
'통한의 36년 세월'

[촬영 이해용]

◇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강간 살인범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

정씨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49년 전인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신헌법 선포 3주 전인 그해 9월 27일 춘천경찰서 파출소장의 9살 난 딸이 춘천시 우두동 논둑에서 강간 살해된 채 발견됐다.

서슬이 퍼렇던 군사독재 시절 경찰관 자녀가 살해된 이 사건은 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시한부 검거령까지 내려졌다.

만홧가게 주인인 정씨는 숨진 피해자의 주머니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 점표가 나오자 체포됐다. 시한부 검거령 마감 하루 전의 일이었다.

정씨는 조사과정에서 범죄사실을 부인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듬해인 1973년 3월 1심인 춘천지법에서 강간치상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같은 해 8월과 11월 서울고법과 대법원에 각각 항소와 상고를 제기했으나 모두 기각됐다.

15년간 복역한 뒤 1987년 모범수로 가석방됐지만, 정씨의 삶과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교도소 복역 중 정씨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사망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아내마저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불운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가석방 이듬해인 1988년 고향인 춘천을 등지고 전북에 내려가 신학 공부에 매진한 끝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정씨는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1999년 11월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2001년 10월 이마저도 기각됐다. 정씨의 억울함은 영원히 묻히는 듯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결백을 호소한 정씨는 2007년 12월 재심 권고 결정을 끌어냈다.

'진실의 승리'
'진실의 승리'

[촬영 이해용]

◇ "고문과 증거 조작" 주장…수사관도 정씨에게 사과·재판부도 머리 숙여

정씨는 재심 청구 과정에서 수사관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고 유력 증거도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2008년 6월 정씨의 재심이 열린 춘천지법 법정에서 그는 자신을 수사한 경찰관들을 다시 만났다.

36년의 세월이 흘러 서로 칠순을 훌쩍 넘겼지만, 이들의 재회는 묘한 긴장이 흘렀다.

재심 법정의 증인으로 출석한 당시의 한 수사관은 심문을 마치고 방청석으로 돌아가던 중 증인석에 앉아 있던 정씨를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해 술렁이기도 했다.

법정을 나설 즈음 정씨와 당시 수사관들은 서로 악수를 하며 모질었던 시절에 대한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결국 그해 11월 재심을 맡은 춘천지법은 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댄 법원마저 적법 절차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했다"며 "피고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하지 않았던 점에서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정씨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정씨는 2012년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형사보상금으로 9억6천여만원을 받았다.

살인 누명으로 15년 옥살이…재심 통해 무죄 확정
살인 누명으로 15년 옥살이…재심 통해 무죄 확정

[연합뉴스 자료사진]

◇ 형사보상 확정일 불과 열흘 지나 소송 제기…국가 배상 못 받아

이후 정씨와 가족은 경찰이 저지른 고문·회유·협박 등의 불법 행위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2013년 7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부는 정씨와 그의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에서 26억여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멸시효가 발목을 잡았다.

소멸시효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데도 행사하지 않는 상태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권리가 사라지게 하는 제도다.

대법원은 소멸시효 기간을 형사보상 확정일로부터 6개월이라고 밝혔다.

정씨는 형사보상 확정일로부터 6개월 10일 뒤 소송을 낸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2014년 1월 서울고법 민사8부에서는 소멸시효 기간이 10일 지났다며 정씨와 그 가족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정씨의 재심 사건을 무죄로 이끈 임영화 변호사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손배소송 1심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소멸시효가 2심 때 적용돼 결국 배상금을 받지 못하는 기막힌 상황이 또 연출된 셈"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정씨의 별세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표창원 전 국회의원은 "재심 무죄 판결을 받은 사법 피해자 고 정원섭씨가 국가배상을 받을 권리마저 억울하게 빼앗긴 아픔 안고 영면에 드셨다. 공정한 하늘에선 억울함 없이 편안하게 쉬시길 기원합니다"라고 애도했다.

고인이 된 정씨의 장례는 이날 오전 10시 30분 엄수됐다. 장지는 용인 평온의숲 이다.

j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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