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공간서 '시간이 빚은 예술' 옻칠의 미를 만나다(종합)
송고시간2021-12-20 14:49
국립중앙박물관 '칠(漆), 아시아를 칠하다'展…자료 263점 한곳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중·일·동남아 칠기 작품 소개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20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漆(칠), 아시아를 칠하다' 언론공개회에서 참석자들이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아시아 각지에서 발전한 다양한 칠공예 기법과 옻칠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263점의 칠기를 선보인다. 2021.12.20 jin90@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초기 문신 성석린은 태종 7년(1407)에 올린 상소문에서 "나라 안이 모두 사기와 칠기를 쓰게 하소서"라고 아뢨다. 중국 명나라 문헌인 '휴식록'에는 "칠기 만드는 법이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는 내용이 있다.
칠기(漆器)는 옻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인 옻을 정제해 칠한 그릇을 뜻한다. 옻을 칠하면 광택이 날뿐더러 방수·방충 효과가 생기고 내구성도 높아진다. 삼국시대 초기 유적을 발굴하면 나무는 썩고 옻칠만 남은 사례가 적지 않다.
옻은 접착력이 있어서 다른 물건을 붙이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좋았다. 얇은 조개껍데기를 여러 형태로 오려 붙여 완성하는 나전칠기는 나전과 옻칠이 결합한 예술품이다. 나전칠기에서 주인공은 나전처럼 보이지만, 옻칠 없이는 제작이 불가능했다. 옻칠은 기능과 장식 측면에서 모두 뛰어난 공예 기법이었던 셈이다.
옻칠은 비단 한반도뿐만 아니라 옻나무가 자생하는 아시아 지역에서 두루 사용됐다. 각국은 고유한 문화를 바탕으로 저마다 독특한 칠공예를 발전시켰다.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20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漆(칠), 아시아를 칠하다' 언론공개회에서 참석자들이 칠기를 관람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처럼 오랫동안 넓은 지역에서 전승된 옻칠과 칠공예 문화를 다룬 특별전 '칠(漆), 아시아를 칠하다'를 21일부터 내년 3월 20일까지 특별전시실에서 개최한다.
국립김해박물관이 2019년에 연 '고대의 빛깔, 옻칠' 특별전을 확대한 이번 전시의 출품 자료는 모두 263점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에서 구매해 들여온 귀중한 고려시대 유물 '나전 국화넝쿨무늬 합'을 처음으로 일반에 선보이고, 동아시아 각지의 칠기를 한데 모아 공개한다. 중국 상하이박물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품도 나왔다.
노남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20일 언론공개회에서 "칠공예는 시간이 빚은 예술"이라며 "옻오름을 이겨내며 도료로 만드는 데 수개월이 걸리고, 물건에 옻칠을 할 때도 칠과 건조를 반복하는 인고의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옛사람들은 도료로서 옻칠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며 "칠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삶 속에 가까이 녹아들어 있는 공예품이었다"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20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漆(칠), 아시아를 칠하다' 언론공개회에서 참석자들이 꽃과 동물무늬를 붙인 거울과 공예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전시는 크게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현대까지 칠기의 변화상을 조명하고, 한국·중국·일본을 넘어 태국·베트남·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칠기를 폭넓게 소개한다.
전시장은 상당히 어두운 편이어서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빛나는 칠기에 저절로 눈길이 간다. 일상에서 자주 쓰는 표현인 '칠흑같이 어둡다'에서 칠흑이 바로 옻칠로 낸 검은빛을 의미한다. 특히 검은 장막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도입부는 서정적인 음악과 흑백 영상이 인상적이다.
칠기 제작 과정을 비롯해 칠기가 도자기·금속 공예품과 주고받은 영향을 살피고 나면 다채로운 칠공예 기법을 확인하게 된다. 옻칠 장식 방법은 간단히 '색을 입히다', '그리고 새기다', '귀한 것을 붙이다'라는 세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옻은 본래 색이 없는 도료로 나무에 바르면 갈색빛이 난다고 한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산화철이나 진사(辰砂) 같은 안료를 추가해 검은색 혹은 붉은색을 내고, 그림도 그렸다.
7∼8세기에는 옻칠한 기물 위에 금이나 은으로 만든 판을 붙이고 다시 옻칠을 한 뒤 갈아서 무늬를 만드는 평탈(平脫) 기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 기법은 지름 18.5㎝인 자그마한 통일신라시대 거울에 적용됐는데, 동물과 식물 장식이 지금 봐도 아름답다.
나전 국화넝쿨무늬 합과 보물로 지정된 나전 경전함, 승려가 수행할 때 사용한 나전 불자(拂子) 등 고려시대 나전칠기 세 점은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 나란히 진열됐다.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20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漆(칠), 아시아를 칠하다' 언론공개회에서 참석자들이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동아시아 삼국인 한국·중국·일본의 칠공예를 한자리에서 비교해 볼 수 있는 점도 특징이다. 한국에서 나전칠기가 꽃을 피웠다면, 중국에서는 여러 겹의 옻칠을 한 뒤 조각하는 조칠기(彫漆器)가 발달했다. 일본은 옻칠 위에 금을 뿌려 화려한 느낌을 주는 마키에(蒔繪)가 많이 만들어졌다.
전시 마지막 부분에서는 칠기의 대중화와 변화를 조명한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나전칠기가 일상 용품으로 쓰였고, 17세기 이후에는 아시아의 칠기가 유럽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현대 작가들이 제작한 다채로운 옻칠 공예품도 감상할 수 있다.
노 연구사는 "작은 칠기 한 점에도 길게는 수천 년의 세월이 쌓여 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많은 관람객이 아시아의 다채로운 칠공예 세계를 만나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20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漆(칠), 아시아를 칠하다' 언론공개회에서 참석자들이 현대 옻칠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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