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가기간뉴스 통신사 연합뉴스
제보 검색어 입력 영역 열기
국가기간뉴스 통신사 연합뉴스
댓글

"'빈곤 포르노'처럼 소비되는 기지촌…새 이야기 하고 싶었다"

송고시간2022-01-21 15:33

댓글

주한미군 위안부 소재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김동령·박경태 부부 감독

"실존 인물 직접 출연…조건으로 전남편 복수극 담자고 해"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연출한 김동령·박경태 감독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연출한 김동령·박경태 감독

[시네마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70대 할머니가 저승길로 향하는 중이다. 한 손에는 전남편의 잘린 머리를 묶은 끈을 꼭 쥐고 있다. 머리는 계곡과 돌, 언덕에 부딪히며 질질 끌려다닌다.

주한미군 위안부 할머니 박인순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장르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실험적 요소가 가득한 괴작이다.

실존 인물인 박 할머니가 등장하고 내레이션이 나오는 초반부에는 다큐멘터리인가 싶다가도 어느새 극영화인 듯 배우들이 나타나 연기를 한다.

박 할머니를 데려가기 위해 저승사자들이 따라붙지만, 가짜 이름으로 살아온 그를 데려갈 수 없어 그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준다는 스토리 역시 독특하다.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 신선한 문제작이라는 평을 들었던 영화는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집행위원회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공동 연출을 맡은 김동령, 박경태 부부 감독은 최근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극영화"라고 소개하면서 "큰 설정만 만들어 놓고 세부적인 내용은 시나리오 없이 그날그날 현장에서 결정해 촬영했다"고 설명했다.

"도발을 많이 하는 영화라 생각해요. 얌전하게 흘러가지만 기지촌에 대한 이미지나 편견을 벗어나 있죠. 새로운 형태의 예술 형식이기도 하죠. 다양한 측면에서 머리와 가슴을 자극하는 영화입니다."(김동령)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중 한 장면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중 한 장면

[시네마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스토리는 박 할머니가 과거 겪은 일들과 그가 직접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짰다. 제목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도 박 할머니의 그림에서 따왔다.

박 할머니는 아이였던 한국전쟁 당시 가족에게서 버려졌다. 이후 서울역을 떠돌다 두 차례나 인신매매를 당했다. 기지촌으로 팔려 간 그는 주한미군 위안부로 일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미군 남편을 만나 시카고에서 잠시 살기도 했으나 폭력에 못 이겨 하와이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여비를 마련해 의정부 소재 기지촌으로 돌아갔다.

박 할머니는 두 감독의 전작인 다큐멘터리 '거미의 땅'에도 출연했다. 이번 영화에 출연할 때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는데, 영화에서나마 전남편에 복수하게 해달라고 했다. 전남편 머리를 끌고 다니는 기괴한 장면이 탄생한 배경이다.

"인순 할머니께서 그걸 꼭 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게 제1 조건이었죠. 알고 보니 몇 년간 그 장면을 계속 그림으로 그려오셨더군요. 결국 특수효과 전문가를 구해서 장면을 완성했습니다."(박경태)

박 할머니의 극 중 연기가 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촬영이 이어질수록 마치 실제로 일이 벌어지는 현장인 것처럼 그곳에 빠져들어 반응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영화에 출연한 전문 배우들이 대본을 외우는 데 몰두하는 대신 "박 할머니와 교감하기 위해" 함께 시간을 보내며 호흡을 맞췄다고 말했다.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중 한 장면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중 한 장면

[시네마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 감독이 주한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장편영화를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그는 "누군가는 우리한테 너무 기지촌 소재를 우려먹는 게 아니냐고 하더라"며 웃었다.

"영화를 함께 만들었던 인연이 지속됐고, 그 과정에서 영화로 만들고 싶은 이야기가 계속 생겨났습니다. 영화를 도구화해서 미군 위안부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려야겠다는 거창한 목적은 없었어요."

두 감독은 기지촌이 "새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예술가에게는 매력적인 장소"라고 입을 모았다.

"70∼80년대 어딘가에 멈춘 공간 같아요. 살면서 절대 만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저마다 비밀을 간직한 곳이죠. 미디어에선 이곳을 '빈곤 포르노' 식으로 소비하는데, 저희는 이곳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요."(김동령)

이들의 다음 작품에도 기지촌 여성들이 나온다. 1970년대 초반 한 주한미군이 기지촌 일대를 촬영한 필름을 바탕으로 제작 중이다. 지금은 여든이 다 된 할머니들의 푸릇한 모습이 담겨 있다는 말에, 미국까지 건너가 그를 설득해 얻어왔다고 한다.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중 한 장면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중 한 장면

[시네마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두 감독은 앞으로도 이번 영화처럼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관객에게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기지촌에 있던 무연고자 묘가 없어지면서 수많은 여성의 뼈가 나오고 산업폐기물처럼 버려졌어요. 그들도 이름이 있었고 나름의 역사와 이야기가 있었으리라는 것. 그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박경태)

rambo@yna.co.kr

핫뉴스

더보기
    /

    댓글 많은 뉴스

    이 시각 주요뉴스

    더보기

    리빙톡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