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법치와 정치의 충돌…'트럼프 늪'에 빠진 미국 정치
송고시간2022-08-15 11:56
진보 논객들조차 "FBI가 트럼프 재선 돕기로 했나?" 비판
"정당한 법 집행도 양극화된 정치 현실에선 '사기' 될 수 있어"
(서울=연합뉴스) 김현재 논설위원 = 지난 8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 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자택을 압수수색한 후 미 정가에 거센 역풍이 불고 있다. 트럼프의 범죄 혐의 입증을 위한 수색이 오히려 그의 재선을 돕는 형국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뭘해도 '트럼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지금 미국 정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압수수색을 "2024년 나의 대선 출마를 간절하게 저지하고 싶은 급진좌파 민주당원의 공격"이라고 규정했다. FBI 압수수색은 비공개로 진행됐는데 이를 SNS로 세상에 알린 것도 '피의자' 신분인 트럼프 자신이었다. 이후 공화당 유력 정치인들이 일제히 그의 뒤에 줄을 섰다. 케빈 매카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는 FBI를 관할하는 메릭 갈런드 법무장관을 향해 "법무부가 정치를 무기화하는 용납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며 11월 중간선거에서 승리하면 이번 압수수색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차기 대선 경선에서 트럼프의 경쟁자로 꼽히는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도 "미 역사상 어느 전직 대통령도 자택이 급습당한 적이 없었다"며 법무부를 공격했고,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역시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기 위한 현 정권의 연방기관 무기화"라고 비난했다. 드샌티스 주지사는 트럼프 정부의 코로나 정책을 비판하며 차기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트럼프에 맞설 유력 주자로 부상하던 인물이다. 트럼프로부터 "멍청이"라는 조롱까지 받은 그였지만 이번에는 온전히 트럼프 편에 섰다.
트라팔가 그룹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75%의 공화당원이 이번 압수수색은 공정한 법 집행이라기보다는 트럼프를 제거하려는 세력이 배후에 있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화당원뿐 아니라 전체 응답자의 48%가 같은 생각이었다. 83%의 공화당원은 이번 압수수색으로 중간선거에서 꼭 투표할 이유가 생겼다고 답했다. 이런 공화당 내 압도적인 트럼프 옹호 분위기에 짓눌려 그의 경쟁자들은 달리 선택지가 없게 됐다. 한 보수 성향 정치평론가는 "FBI가 트럼프에게 생명선을 던져줬다"며 "다시 공화당 전체를 트럼프의 마차로 밀어 넣고 있다"고 했다.
진보 진영 논객들도 FBI 수사에 우려를 표했다. 데이비드 브룩스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는 "미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또 트럼프가 다시 백악관에 들어가는 것도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전자(사법적 행위)가 후자(트럼프 재선)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갈런드 법무장관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수사 협조를 거부해 압수수색이 불가피했다며 이례적으로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해명성 브리핑을 했고, 백악관도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압수수색에 대한 보고를 받지 않았다. 법 집행 문제는 법무부의 영역"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런데도 공화당원들은 이를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트럼프 지지자로 추정되는 40대 남성이 신시내티 FBI 지부에 침입하려다 추격전 끝에 사살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만일 트럼프의 범죄혐의가 입증돼 그가 기소될 경우(지금 FBI 수사는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국의 민주, 공화 양대 정당은 선거 일정에 따라 후보를 선출할 것이고, 공화당 후보로 트럼프가 결정될 그즈음에 법원이 트럼프를 감옥에 보내라고 선고한다면 말이다. 절반의 미국인들은 "민주당 정권이 나라를 훔쳤다"고 판단할 것이고, 대대적인 정치적 폭력 행위가 미국 전역에서 벌어질 개연성이 크다고 브룩스는 전망했다. 세계 최강국, 최고의 문명국 미국에서 범죄 혐의가 입증된 일개 정치인 때문에 '바나나 리퍼블릭'에서나 가능한 일이 설마 벌어지겠느냐고? 이미 우리는 2021년 1월 트럼프의 대선 불복 메시지가 나온 이후 수백 명의 극성 지지자들에 의한 미 의사당 점거 사태를 목격한 바 있다. 트럼프가 기소되면 그때보다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고 미국 민주주의는 작동 불능의 상태로 빠질 수 있다. 미국의 집단 이성이 최악의 사태를 막아내지 않겠느냐는 낙관론을 펴기에는 지금 미국은 너무 멀리 가 있다.
법은 눈이 없다고 한다.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이론상 그럴 뿐이다. 트럼프 처벌에 반대해온 저명 언론인 데이먼 링커는 "정치의 영역은 칸트 윤리학의 세미나가 아니다. 국민 절반이 '그건 사기야'라고 생각한다면 법의 지배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법치도 현실 정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더욱이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 상황에서 범법자 정치인이 선동적 화법으로 지지층을 자극해 법 집행 무력화를 시도한다면 법치와 정치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시시비비를 가릴 여유도 그럴 필요도 없이 절반의 민심은 폭풍이 될 것이다. '엘리트 정치권에 대한 불신-국가 법 집행기구의 신뢰성 위기-법치와 정치의 충돌'은 민주주의의 위기와 직결된다. 이것이 비단 미국만의 문제일까.
kn020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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