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한달] ⑤우리 주변의 '또 다른 이태원'
송고시간2022-11-28 06:01
밀집 익숙한 사회…지하철·초고층 빌딩 등 곳곳 위험 산재
전문가들 "새로운 재난 형태 대비…안전의식 높이는 게 관건"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30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인명사고 현장에 구급차가 모여있다. 2022.10.30 jieunlee@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계승현 기자 = 이태원 참사는 서울 한복판 '이태원'이라는 친숙한 공간에서, 그것도 대규모 압사라는 예상치 못한 형태로 발생한 재난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안겼다.
일상에서 늘 친숙하게 지나다니던 공간이 언제든 끔찍한 재난의 현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변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건물에서 비상 탈출하는 상황에서 압사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고 경고한다.
실제 2003년 2월 미국 시카고의 한 나이트클럽에서는 건물 내에 있던 사람들이 비상 탈출을 위해 한꺼번에 좁은 통로로 몰리면서 21명이 숨졌다. 국내에서도 1959년 7월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시민 위안잔치에 참석한 관중 3만여명이 소나기를 피하려 좁은 출입구로 몰려 67명이 압사했다.
그동안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을 뿐, 밀집도 높은 한국 사회의 특성상 비슷한 참사 위험은 산재해 있으며 압사라는 형태가 꼭 후진국형 재난만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표적인 곳이 출퇴근 시간대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지하철 역사 안, 그중에서도 에스컬레이터나 계단과 같이 경사진 공간이다. 매일 지나다녀 익숙한 나머지 위험한 곳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도미노'처럼 작은 시작이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송규 한국안전전문가협회 회장은 "지하철 객차 안보다 계단이 특히 위험하다"며 "수많은 사람이 밀집돼 한꺼번에 내려가는 경사진 계단에서는 뒤에서 몇 사람만 밀어도 도미노처럼 무너진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다행히 지금까지는 큰 사고가 없었지만 이번 이태원 참사는 밀집된 공간에서 단 몇 사람에 의해 매우 큰 사상자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다"며 "반사회적 테러 등의 방법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보여준 것이어서 매우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극장, 공연장, 종교시설 등 대규모 인원이 모이는 공공시설뿐 아니라 최근 아파트 재건축 등으로 빽빽하게 들어서고 있는 초고층 건물도 언제든 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대표적 공간이다.
9·11 테러 이후 세계무역센터 건물 붕괴 원인을 조사한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는 무역센터가 대규모 비상 탈출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설계됐다고 지적하면서 만약 건물이 꽉 찬 상태였다면 탈출 과정에서 1만여명이 추가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9·11 테러의 공식 사망자 수(2천996명)의 세 배가 넘는 수다. 그만큼 인파가 좁은 공간에 몰리면서 발생하는 안전사고는 순식간에 대형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 회장은 "초고층 건물들은 화재 시 언제든 '감옥'으로 바뀔 수 있는 공간"이라며 "시스템적으로 대비할 수 있도록 설계는 하고 있지만 실제 사고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황광모 기자 = 1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KSPO 돔에서 2022 재난 대응 안전한국 훈련 중 하나로 열린 긴급구조 종합훈련이 열렸다. 이 훈련에 참여한 송파소방서 구급 대원들이 호흡이 멈춘 가상의 환자에 대해 CPR을 실시하고 있다. 2022.11.16 hkmpooh@yna.co.kr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정부도 출퇴근 시간 등 혼잡도가 높은 시간대에 지하철에서 발생할 수 있는 비상 상황에 대한 대책을 마련에 나섰다.
이와 관련해 최돈묵 가천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환승역 등 혼잡도가 심한 지하철역에 안전요원을 배치해 유사시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송규 회장도 "위험 요인별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가장 밀집도가 높은 곳이 어디인지, 가장 위험한 시간대는 언제인지부터 데이터를 모아야 한다"며 "그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예컨대 지하철의 경우 '현재 밀집도가 얼마이니 무정차 통과하겠다'는 식의 안내 방송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입석으로 운영되는 경기 지역의 광역버스는 18일부터 입석 승차를 중단했다.
고왕열 우송정보대학 소방안전관리과 교수는 "아직 큰 사고가 없어서 그렇지 광역버스 통로에 사람 꽉 차서 다니다 인명 사고가 났으면 큰 이슈가 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사회 환경이 달라지면서 재난의 형태 또한 새롭게 바뀌고 있는 만큼 경찰·소방, 재난 관련 기관과 공무원부터 새로운 재난 형태에 대한 안전 지식을 철저히 익힐 필요가 있다고도 조언했다.
이 회장은 "112, 119에 이태원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들어갔다면 대응이 이렇게 늦었을까"라고 반문하면서 "수차례 신고가 미리 들어갔어도 대응이 늦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압사 사고라는 것에 대해 경찰도, 소방도 전혀 몰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경찰, 소방 모두 우리 사회에서 생소한 압사라는 사고 형태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상만 한국재난안전기술원 원장은 무엇보다 이번 참사가 국민의 안전의식을 새롭게 바뀌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 원장은 "건축법을 새롭게 정비한다거나 하는 하드웨어적 대비도 물론 중요하지만, 소프트웨어적 부분이 훨씬 더 중요하다"며 "중대재해처벌법의 경우도 처벌만 한다고 사고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므로 안전의식에 대한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도 철저한 안전 교육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는 "안전과 방재에 대한 교육이 평상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유사시 머리가 아니라 몸이 움직일 수 있게 교통, 화재, 생활안전 등 분야에서 어렸을 때부터 교육하고 평생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y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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