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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원사에 짓밟힌 뇌병변장애인의 삶…"가해만큼 엄벌을"

송고시간2023-01-23 08:03

7개월간 성폭행 피해에 "밤마다 악몽…다신 저 같은 일 없기를"

"하루빨리 재판 끝나고 시인으로, 인권운동가로 되돌아가고파"

'다른 중증 장애인들은 이런 일 따윈 당하지 않기를…'
'다른 중증 장애인들은 이런 일 따윈 당하지 않기를…'

[촬영 박영서]

(춘천=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다른 중증장애인들은 저와 같이 이런 일 따윈 당하지 말고 이런 끔찍한 악몽은 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재판장님과 재판부에 호소합니다…그 사람이 저에게 한 일 만큼 엄벌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 때문에 가만히 있기조차 어려운 뇌병변장애인 정모(52)씨가 지난 20일 기자에게 보여준 '손가락 1개'로 자판을 두드려 쓴 글에는 그의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충격, 고통, 악몽, 엄벌로 표현한 단어에서는 격앙된 감정이 느껴졌고, 문장 끝머리마다 찍힌 두 개의 마침표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소용돌이치는 불안한 마음이 묻어났다.

큰 글씨로 쓴 A4용지 1장 남짓한 글이지만, 그 행간에는 미처 담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있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자신만의 돋보기로 세상을 표현, '손가락 시인'으로 불린 정씨는 중증장애인들에게 희망이자 행복이었고, 시작(詩作)은 그가 더 단단하게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2020년 11월 활동지원사 안모(50)씨와의 만남 뒤로 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정씨가 안씨와 보낸 7개월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형"이라고 부르며 정씨의 일상을 지원하던 안씨는 정씨에게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온갖 성폭력과 폭행을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

견디다 못한 정씨는 노트북 카메라의 타이머 기능을 활용해 차곡차곡 증거를 모았고, 2021년 6월 안씨를 고소했다.

가족들이 피해 사실을 알게 될 때 받을 충격과 가해자가 구속되지 않으면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에 여러 차례 고소를 주저했지만, 안씨의 범행이 심해지면서 더는 홀로 감내할 수 없었다.

뇌병변장애인 성폭행한 활동지원사 엄벌 촉구
뇌병변장애인 성폭행한 활동지원사 엄벌 촉구

[연합뉴스 자료사진]

평소에 TV에서 사건·사고 소식이 전해질 때면 '저런 건 증거가 없으면 처벌이 안 된다'는 안씨의 말을 들었던 정씨는 증거를 모으기 위해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직접 만들어 어렵사리 증거를 수집했다.

푸른 들판에서 잡초처럼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났던 삶을 무너뜨린 가해자가 너무도 미웠지만, 고소를 결심한 뒤 "여행을 간다"며 거짓으로 안씨를 내보내던 마지막 날 정씨는 왠지 모를 동정심에 점심까지 사 먹였다.

결국 안씨는 2021년 2∼5월 네 차례에 걸쳐 정씨를 상대로 유사성행위를 시도하고, 다섯 번에 걸쳐 강제추행하고, 7회에 걸쳐 머리 등을 때린 혐의(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로 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넘겨졌다.

범행 장면이 선명하게 촬영되지 않아 공소장에 담기지 못한 피해는 훨씬 많았지만, 안씨는 법정에서 증거가 명백한 혐의만 인정할 뿐 나머지 범행은 부인했다.

이에 정씨는 "법정에서 직접 피해 사실을 밝히겠다"며 용기를 내어 지난해 5월 증인으로 출석했다.

정씨는 재판이 시작된 이후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없인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마음이 도통 안정이 되지 않아 심리치료까지 받고 있다.

사건 이후 몸이 경직되는 횟수도 부쩍 늘어 안정제 복용 횟수가 권고 횟수를 넘는 날이 부지기수고, 잠을 자다가도 소리를 지르거나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는 날도 적지 않다.

정씨는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충격과 고통은 일일이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밤이면 밤마다 그 사람과 함께 할 때 당한 일들을 악몽으로 꾸었어요…"라며 띄엄띄엄 힘겹게 말을 이었다.

가해자의 재판은 오는 2월 1일 항소심 선고만을 앞두고 있다.

1심의 징역 10년형에 불복한 검찰은 "형이 가볍다"며 징역 14년을 구형했고, "형이 무겁다"며 항소한 안씨는 "장난으로 한 행동들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정씨가 가장 아끼는 시 '바보처럼 살아도'
정씨가 가장 아끼는 시 '바보처럼 살아도'

[촬영 박영서]

정씨는 "개구리한테 장난으로 돌을 던져봐라. 개구리가 어떻게 되나. 개구리는 목숨이 달린 문제다. 장난으로 할 일이 아니다"라며 엄벌을 탄원했다.

이어 "(검찰 구형량인) 징역 14년도 만족하지는 않는다. 한 20년, 그 이상이면 좋겠다.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용서가 안 된다"고 했다.

그는 하루빨리 재판이 끝나 피해를 극복하고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무엇보다 첫 시집을 낸 지 20주년을 맞는 올해 새로운 작품으로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사이버 장애인 자립생활 운동부터 자립생활 정보공유 인터넷 카페 운영, 장애인 자립생활 프로그램 리더, 장애인 인권 교육 강사까지, 다시금 '장애인 인권운동'에 앞장설 날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세상 모르는 것처럼 / 정신 없이 / 바보처럼 살아도 / 마음이 아플 때가 있어요'

가장 아끼는 자신의 시 '바보처럼 살아도'의 한 구절처럼 여전히 사건 트라우마로 마음 아픈 날이 많은 정씨지만, 오늘도 새벽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장애인들의 고단한 삶에 밝은 햇살 같은 존재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conany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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